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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이야기] 어느 국가 대사의 비참한 최후

마키 2021.06.01 02:11:50

*이하의 내용은 유튜버 64 denden 님의 영상 [미혹열차(迷列車)로 가자] 세계에서 가장 아까운 SL - 전진형 6200호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작성되었습니다. 迷列車는 미혹할 미를 쓰고 발음은 메이로 읽는데, 같은 발음을 공유하는 이름 명(名)의 발음장난이지만, 뜻풀이가 애매해서 그냥 미혹으로 번역했네요.





때는 1982년.


1972년의 중일 국교 정상화로부터 10주년이 되는 이 해를 기념해 일본 요코하마(横浜) 시 사쿠라기쵸(桜木町) 역 앞 광장에서 중국철도박람회(中国鉄道博)가 개최됩니다. 타국의 기관차나 철도차량이 자국에 전시되거나 실제로 본선에 투입되는건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었지만, 터널로 유럽 대륙과 물리적으로 연결된 영국 등과 다르게 고립된 섬나라였던 일본의 철도 환경 특성상 이때 중국이 기념으로 보내준 기관차들은 해외의 철도차량을 볼 기회가 드물었던 일본 사람들에겐 대단한 볼거리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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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도박물관(中國鐵道博物館)에 보존된 해당 기관차. 사진의 위쪽이 인민형 1001호기, 아래가 전진형 0001호기.)


이때 일본에 온 기관차 중에서도 중국을 대표하는 기관차로서 선택된 차량이 인민형(人民型) 증기기관차전진형(前進型) 증기기관차였습니다. 인민형은 다른 이름으로 RM형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중국어로 인민을 뜻하는 "REN MIN(렌민)"의 두문자였고, 전진형은 다른 이름으로 QJ형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역시 중국어로 전진을 뜻하는 "QIAN JIN(첸진)"의 두문자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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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람회 당시인 1982년 8월 21일에 촬영된 전진형 증기기관차 QJ6200호기.)


드넓은 중국 대륙을 달리던 이국적인 외관과 우락부락한 덩치를 지닌 이 기관차들은 철도박람회에서도 최고의 수퍼스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죠. 박람회 팸플릿 등지에서는 "니하오~! 드넓은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물자와 사람을 옮기며 중국을 견인해온 현역 기관차들을 일본에~" 풍의 뉘앙스로 쓰여있었고, 이것만 보면 조국에서의 격무에서 벗어나 느긋하게 박람회장의 방문객들을 실어나르며 여흥을 즐기는 것 처럼 보였겠지만 실은 이 팸플릿에는 충격적인 비밀이 숨어있었는데요(?).



1966년에 마지막 258번째 차량이 생산된 인민형 기관차 RM1163호기는 분명 중국 대륙에서 물자를 나르던 기관차임에 틀림없었지만, 전진형 기관차는 이 시점에서도 활발히 신규 차량이 계속 생산중이었고(위키피디아 중국어판 문서에 기록된 생산 종료 연도는 1988년, 총 생산댓수는 4708대.), 일본에 보내진 이 전진형 기관차 QJ6200호기는 1982년에 생산되어 오직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 대사로서 이 중일 교류 정상화 10주년 기념 철도박람회를 명분으로 일본에 기증되기 위한 목적으로만 신규 제작된 기관차 였습니다(...). 화물을 끌어본 적도, 승객을 태워본 적도 없이 공장에서 출하되자마자 중국을 대표하라는 사명을 부여받고 표준궤 규격조차 아닌 일본에 외로이 보내진, 중국에서 제조되어 일본에 기증되기 위한 목적으로만 만들어진 표준궤 신조 기관차라는 무시무시한 이력의 기관차였죠...


물론 이왕 받아본거 써먹어보자 할 수도 있으시겠지만, 이 기관차는 기본적으로 드넓은 대륙을 주무대로 달리기위해 제조된 대형 기관차. 일본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1,037mm의 케이프 궤간 협궤와 1,435mm 표준궤 간의 368mm 궤간 차이 따위는 너무도 사소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이 전진형 기관차, 원래는 소련의 광궤형 증기기관차인 LV(러시아어 표기로는 ЛВ)형 기관차의 설계도를 중국이 구입해 중국 철도 규격에 맞추어 표준궤형으로 개수한 기관차였습니다.


그렇다보니 아무리 표준궤로 개수됐다고는 하나, 원래부터 고향 소련의 광궤 규격에 맞춰 설계된 이 기관차는 총중량 125톤의 D51형이나 여객철도 최대의 덩치를 자랑하는 C62형의 총중량 145톤을 아득히 상회하는 총중량 229톤에 달하는 무게에 전장 29미터, 높이 4.7미터의 몸집을 자랑하는, 일본의 철도 시설 규격을 깡그리 무시하는 수퍼헤비급 기관차였죠(...). 당연히 제아무리 표준궤 규격의 신칸센(축중 18톤)이나 일부 표준궤 사철(축중 14톤)이라해도 성능마저 희생하고 승객수송량에 모든걸 투자한 차량 길이 25미터, 폭 3.3미터, 높이 4.4미터의 2층 신칸센 E4계 MAX보다 큰 덩치에 축중 20톤을 넘는 규격 외의 괴물인 전진형 기관차를 감당할 수 있을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리하여 끌고다닐 표준궤 규격의 화차도 객차도 없는건 차치하고 그 거대한 덩치 탓에 일본의 선로를 달릴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던 이들 기관차들에겐 박람회장의 콘크리트 바닥에 부설된 수십미터 짜리 이벤트 주행용 표준궤도가 달릴 수 있는 선로의 전부였습니다. 1982년 7월 25일부터 동년 8월 31일까지 개최되었던 요코하마의 박람회가 끝나고 이들은 그 다음해인 1983년이 되자 다시 일본 고베(神戸) 시와 중국 천진(天津) 시의 도시간 우호 교류 10주년을 맞이해 고베 시에 있던 미나토가와(湊川) 역 화물선 부지(이 시점에서 역 부지는 본래의 화물선으로서는 폐지된 상태였습니다.)에 보내져 1983년 3월 19일부터 동년 5월 22일까지 개최된 철도박람회장에 전시되었고 요코하마의 박람회처럼 동태보존으로 이벤트 운행을 행하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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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2월 2일, 해체 처분 직전에 촬영된 전진형 QJ6200호기의 끔찍한 말로...)


그 일수는 양 박람회를 합쳐서 단 103일.


이 두번의 박람회에서 방문객들을 태우며 보냈던 단 103일이 일본에 보내진 전진형 QJ6200호기에게 허락된 동태보존 기관차로서의 모든 생애였습니다. 요코하마와 고베의 중국철도박람회를 마치고 아이오이(相生) 시에 있는 아이오이 중앙공원(相生中央公園)에 보내진 인민형 RM1163호기와 전진형 QJ6200호기는 조국 중국에서도 그리고 동료도 없이 홀로 보내진 일본에서도 두번 다시 달리는 일 없이 정태보존 기념물로서 보존...이라기보단 거의 방치에 가까운 무관심 속에 박람회 당시에 번쩍거리는 관리를 받았던 기관차가 문자 그대로 녹슨 고철 더미가 되어버렸고 결국 2006년에 해체되는 최후를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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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오이 시 아이오이 중앙공원에 보존된 전시물.)


이들의 흔적은 동륜 한 쌍과 보일러 전면 덮개, 그리고 이들이 한때 기관차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념명판만으로 남아있습니다.



이것이 중일 우호 교류를 기념하기 위해 공장에서 태어나자마자 동료도 없고 궤간도 다른 머나먼 이국 땅에 국가를 대표하라는 사명만을 부여받고 보내진, 103일의 짧은 생애동안 박람회장의 한정된 이벤트 선로만을 달려야 했던 국가 대사의 비참한 최후였죠...




[사진출처]

중국철도박물관 보존기: http://www.2427junction.com/chinareportcm2.html

아이오이 중앙공원의 전시물 사진: https://rubese.net/gurucomi001/?id=405761

박람회 당시의 모습과 아이오이 중앙공원에 전시되었던 모습: 위키피디아 일본어 판 中国国鉄前進型蒸気機関車(중국 국철 전진형 증기기관차) 문서


[내용출처]

유튜버 64 denden: 【迷列車で行こう】世界一もったいないSL - 前進型 6200号 - https://youtu.be/JkDZLIBED_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