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읽었던 공상과학소설에는 전세계를 잇는 진공튜브궤도 속을 달리는 초고속 열차 이야기가 잘 나왔습니다. 그리고 상정된 속도 또한 엄청나서 시속 몇천 km 정도는 우습게 여길 정도였지요.
21세기가 시작된지도 꽤 오래된 지금, 그런 진공튜브열차는 아직 실용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연구는 진행되는 듯 합니다. 지금의 기술발전속도로 봐서는 실용화도 결코 공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의외의 요소가 문제가 될 듯 합니다. 열차를 달리고 멈추게 하는 기술이나 건설 및 운용에 필요한 비용의 문제가 아닌 의외의 요소가.
뉴욕과 로스앤젤레스를 잇는 어떤 교통수단을 설정해 본다고 하지요.
이 두 도시의 최단거리는 3,944km이고, 뉴욕은 미국의 동부 해안에, 로스앤젤레스는 서부 해안에 있습니다. 이 도시 사이에는 록키산맥 등의 험한 산지, 애팔래치아산맥같은 완만한 산지는 물론이고 그 사이에는 사막, 프레리 등 다양한 지형이 있습니다. 교통수단에 따라서는 이러한 지형적인 특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지의 여부가 크게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일단 항공의 경우를 볼까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항공기가 나는 구간에서 대공포탄, 지대공미사일이나 드론 등의 위험물이 날아다니는 상황이 아니라면 지형을 고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항공기의 순항고도는 험준한 록키산맥의 해발고도보다 더 높고, 오로지 문제되는 곳은 공항 주변의 지형과 기상상황일테니까요. 그런데 철도같은 육상교통수단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선로가 지나가는 지역의 고도, 경사율, 기후특성 등등이 모두 고려요소가 될 수밖에 없고,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지하터널의 경우라면 지층의 상태, 지진 등에 더욱 민감해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것을 수치로 나타내 보면 어떨까요?
항공의 경우는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각각에 있는 공항의 신뢰성만 100%이면 됩니다. 즉 그 사이는 0%가 되더라도 직접 항공기의 운항을 위협하는 위험물이 항공기에 날아드는 일이 없다면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철도의 경우는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의 터미널역은 물론이고 모든 구간의 모든 선로가 100%의 신뢰성을 지녀야 합니다. 어느 한 곳이라도 그 미만이 되면 대참사는 예약되어 있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선로에 차륜이 잘 구속되기만 하면 되는 재래식철도와는 달리, 진공을 유지해야 하는 튜브는 외부에서의 충격 또는 자체적인 문제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당장 선로의 부등침하 같은 게 일어나도 재래식철도는 느리게나마 달릴 수는 있지만, 진공튜브열차의 경우는 아예 달릴 수 없거나, 문제를 무시하고 달리게 되면 필연적으로 대형사고로 이어지게 되는 문제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또 하나의 복병도 있습니다.
여객수송을 전제로 하는 교통수단이 공기 문제를 빼놓을 수는 없는 법.
기존의 교통수단의 경우는 아주 간단합니다. 외부에서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여서 환기시키고 난 뒤 기존의 공기를 밖으로 내보내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진공튜브열차에서는 이 방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공기의 저항을 극도로 줄여 초고속운행을 실현하려는 진공튜브니까, 탑승자가 이용할 공기를 차내에 미리 탑재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공기적재수단의 신뢰성, 그 수단을 추가로 탑재하면서 생기는 중량증가 등의 문제인데, 이것은 기존의 교통수단에 비하면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럼 다시 돌아가서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이야기로.
현재 항공기의 속도를 감안하면, 이 두 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데에는 5시간 이내면 됩니다. 북미대륙의 동단과 서단을 잇는 장거리여행임에는 틀림없지요. 하지만 고의적인 공격이나 극단적으로 나쁜 날씨가 아닌 이상 현재의 기술수준으로도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교통네트워크가 작동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도시를 진공튜브열차로 연결하게 된다면, 1970년대의 추산으로도 건설비는 1조 달러 이상(전구간 지하 210m 터널) 들게 되고, 기존의 교통수단보다 기술요구수준은 높으면서 신뢰성은 더욱 낮은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설령 어디에서 귀금속 운석이라도 나게 되어서 자금 문제는 해결되었다 치더라도, 구간의 신뢰성의 최소 요구값이 100%인 이런 교통체계를 선뜻 이용할지는, 글쎄요. 저라면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얼마나 빨라야 신뢰성 문제를 상쇄할 수 있을지도 답변할 수 없겠습니다.
세계각지의 진공튜브열차 연구자들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도있게 다루고 있을지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