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품을 평가하는 장소에서는 작품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비판의 강도에서도 비판의 이유에서도 다양하죠. 누군가는 거의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하는 반면 누군가는 이성적인 비판을 합니다. 누군가는 창작자나 관련자 때문에 비판하는 반면 누군가는 작품 자체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이런 비판에 대한 반응도 다양해요. 단순히 자신과 다른 가치관을 지녔다고 보는 경우도 있고 반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아예 부정적 시각을 보이는 사람들을 비꼬거나, 수준이 낮다고 욕하거나, 보지 말라고도 합니다.
이런 욕설과 비꼼, 그리고 보지 말라는 발언이 논리적으로는 옳지 않을 수도 있죠. 그런데 그렇다고 아주 이상한 말도 아닙니다. 팬의 입장에서는 해당 부정적 판단의 근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으니까요. 실제로 일본의 소년 만화 “블리치”는 특유의 허세와 턴제 배틀 때문에 비판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걸 좋아하는 팬들 역시 많은 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런 식의 비꼬기나 욕설은 이해할 수 있어요. 일반적인 경우에 한정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 이상하지 않은 행동을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대상의 관련자, 특히 창작자가 그들입니다.
저의 외조모께서는 전통 무용가이십니다. 관련 분야에서는 유명하신 분이시죠. 그리고 돌아가신 외조부께서는 외조모께서 추신 춤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고 연구하시는 무용연구자이시자 비평가셨습니다. 저희 외조모께서 추신 춤은 지금 와서는 일종의 전통무용으로 취급받습니다만 과거에는 새로운 무용으로 취급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시선을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하죠. 외조부와 외조모께서 공연 회의에 참석하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한 무용가가 말했다고 하더군요. 관객들의 수준이 낮으니 그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행동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외조부께서는 역성을 내셨다고 하시더군요. 감히 오만하게 관객 분들을 수준 낮다고 발언하고 그들의 수준을 끌어올린다는 발언을 할 수 있느냐, 너는 예술가로서 엄청나게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발언이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예술가가 예술가로서 있을 수 있는 근원은 관객에게 있다고 보셨거든요. 저는 저의 외조부의 시선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예술가가 예술가로서 활동할 수 있는 것 그것은 관객 때문입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요? 그것은 기본적으로 예술의 가치는 온전히 관객이 부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다비드 상에 대해서 생각해보죠. 다비드 상은 훌륭한 예술 작품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제가 굳이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겠죠. 그렇기에 현대인들은 다비드 상을 굉장히 가치 있는 대상으로 여길 겁니다. 그걸 살 수도 없겠지만 만약에 살 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가격이 매겨지겠죠. 그런데 이 다비드 상을 그대로 보존해서 매드맥스 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에 가져간다고 가정해봅시다. 과연 그 시대의 사람들은 다비드 상에 어떤 가치를 매길까요? 그런 세계에서 다비드 상은 기껏해야 돌덩이 정도로 여겨질 겁니다. 건축하는데 부족하다면 부수어서 건축자재로 사용될 수도 있고 무기가 필요하다면 팔다리를 잘라서 휘둘러댈지도 모르겠죠. 어처구니없는 결과지만 이는 어쩔 수 없습니다. 다비드 상이란 것은 결국 대중이 매긴 가치를 제외하면 단순한 돌덩어리에 불과하거든요. 이는 다른 예술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중이 가치를 매기지 않는다면 책은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아도 단순한 잉크와 종이에 불과해요. 디지털 그림은 단순한 0과 1의 전기 신호에 불과하고 아름다운 가구는 단순한 목재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가치는 대중이,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해당 물건의 소비자에게 달려있어요. 때문에 그들이 좋아하는 작품은 가치가 올라가고 싫어하는 작품은 가치가 내려갑니다. 이는 대중적인 작품일수록 정도가 심해지게 되죠.
이런 시점에서 볼 때 창작자가 그걸 소비하는 소비자층에게 비꼼을 던지고 싫으면 관두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네, 그건 자해행위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창작물이 지닌 가치를 그리고 그 가치 기반을 무너뜨리는 행위죠. 그렇기에 결과를 생각하면 도저히 해서는 안 되는 발언입니다. 그렇다면 가끔 이런 발언을 하는 창작자들은 대체 왜 그럴까요? 세세하게 따진다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보통 둘 중 하나의 이유 때문입니다. 오만 혹은 우둔이죠. 오만은 작가가 팬들에게 칭송받다보니 자신이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대상, 즉 물이나 식량 같은 생필품들을 생산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 경우입니다. 이런 작가들의 마인드는 간단해요. “네가 감히 안사고 어쩌겠느냐?” 혹은 “네가 안산다고 해도 내 작품의 가치는 떨어지지 않는다.” 어느 쪽이든 작품의 가치는 수직하락하게 되고 이들의 오만은 처참한 결과로 다가오게 되죠. 우둔은 좀 다른 케이스로 본인이 화가 나서 참지 못했기에 한 발언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이쪽은 오만보다는 그래도 정상참작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여전히 심한 타격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어요. 특히 상대가 이성적으로 말했는데 이렇게 반응했다면? 오만보다 더 큰 타격을 받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창작자가 아마추어 동인 작가라면 이 가치 깎아먹기의 결과는 최소한으로 다가옵니다. 어쩌면 단순히 본인이 욕을 먹는 정도로 끝나겠고 최악의 경우라고 해봤자 소비자들에게 철저히 외면 받는 정도겠죠. 그렇기에 스스로 그런 결과를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있다면 그렇게 말해도 별 문제는 없을 겁니다. 본인이 그 대가를 치르겠다는데 뭘 어쩌겠어요. 그런데 프로가 되면 좀 사정이 복잡해집니다. 그렇게 작품의 가치가 깎이게 되면 타격을 받는 이들이 하나, 둘이 아니게 되거든요. 한 번 삽화가 들어간 소설로 예시를 삼아보겠습니다.
삽화가 들어간 소설의 작가가 소비자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그래서 작품의 가치가 심하게 떨어졌죠. 과연 누구에게 피해가 들어올까요?
처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삽화가입니다. 해당 작품의 가치는 둘이서 나누는 것인데 한 사람의 잘못 때문에 자기 작품의 가치도 떨어졌거든요.
출판사 홍보팀에게도 피해가 옵니다. 그 소설을 소비자에게 긍정적으로 어필하기 위해 시간을 쏟아왔는데 그냥 물거품이 되어버렸네요. 이 사람들 엄청 허망할 겁니다.
그 이후 출판사에서 줄줄이 피해자가 나오게 됩니다.
관리 감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편집자.
부적절한 인선 등용으로 책임을 지게 될 공모전 심사위원.
금전적 손해를 보게 된 출판사의 운영진들.
그 작가는 이 수많은 피해자들에게 어떻게 보상을 할까요? 아니 애초에 보상을 할 수 있을까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소비자가, 대중이 늘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주장은 헛소리에요. 그런데 대중이 창작자를, 더 나아가서 창작자가 속한 직장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애초에 창작자가 지닌 가치를 부여해준 것은 바로 그들이거든요. 그렇기에 프로 창작자는 늘 조심해야 합니다. 가끔 이를 깨닫지 못하고 사고를 치는 창작자들도 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