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여전히 사회 곳곳에 반공적인 분위기가 많았던 1990년대에도 이상하게 북한의 언어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북한의 언어가 주체적이라는 믿음이 팽배해 있었다 보니 그러했습니다. 특히 당대에 유행했던 언어순화에 영어나 일본어에서 유래한 어휘를 몰아내자는 담론이 아주 지배적이었다 보니 영어나 일본어 유래의 외래어를 쓰지 않는 북한의 언어생활에 배울 것이 있다 운운하는 발언은 이상할 정도로 큰 호응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 환상을 대학생 때의 수업중 토론으로 박살내 버린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 시점에서 저는 독일어, 일본어 및 러시아어를 조금씩 구사할 수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조사를 마쳐둔 게 있었습니다. 여러 학생들이 북한이 고유어를 잘 살려쓰고 영어는 아예 안 쓰는데다 역시 친일파를 숙청한 정통성 있는 정권답게 일본어도 배제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저의 발표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럼, 주머니종, 바레에, 고뿌, 벤또, 전색은 뭔지 아시는지요?"
아무도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리고 해설을 하나하나 해 주었습니다. 모두가 북한에서 쓰는 어휘이고, 차례대로 무선호출기(삐삐), 발레, 컵, 도시락, 뒷조사의 의미인데다 어원이 일본어의 포케베루(ポケベル), 바레에(バレエ), 콥뿌(コッブ), 벤토(弁当), 센사쿠(詮索)라고. 특히 주머니종은 일본어 조어의 포켓+벨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다 바레에, 곱뿌 및 벤또는 일본어 발음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고 전색은 센사쿠의 한자표기를 한국어로 읽은 것에 불과하다고.
누가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북한에서는 벤또라는 말은 없고 도시락에 대응되는 북한의 어휘는 곽밥이라고.
그래서 저도 받아쳤습니다. 당시는 여만철씨 일가의 탈북에서 몇년 안 지난 시점인데다 당시 기자회견 당시 그의 딸 여금주씨가 "벤또" 라는 말을 썼던 기사를 준비해 두었다 보니 즉좌에서 반박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반박한 사람은 한 마디도 못 하고 수업 끝까지 침묵을 지켰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더 나서서, 북한이 그렇게 좋아하는 공화국도 일본에서 만들어진 조어라는 점을 거론했습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강변했습니다. 최소한 북한은 영어같은 서양언어에서 어휘를 빌려오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일부러 도발하듯이 비웃으면서 대꾸했습니다. "서양 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수용해 오면서 어휘는 잘도 빼놓고 오겠군요." 라고.
건방지다고, 왜 비웃느냐고, 당신이 북한에 가보기라도 했냐고 야유가 쏟아졌지만 그런 것은 싹 무시하고 자료를 제시했습니다. 삐오네르, 꼴바사, 뜨락또르, 모또찌끌, 버미돌, 사바까 등에 대해서.
삐오네르(Пионер)는 개척자의 영단어인 파이오니어(Pioneer)과 같은 기원의 단어로 소년단을 지칭하는 어휘.
뜨락또르(Трактор)는 트랙터의 영단어인 트랙터(Tractor)와 같은 기원의 단어로 사실상 키릴알파벳으로 옮긴 것에 불과한 말.
꼴바사(Колбаса)는 소세지의 러시아어 어휘. 정확한 발음은 "깔바사" 에 가깝습니다.
모또찌끌(Мотоцикл)은 모터사이클의 러시아어 어휘. 이것도 뜨락또르처럼 알파벳만 키릴알파벳으로 옮긴 수준입니다.
버미돌(Помидор)은 토마토의 러시아어 어휘로 발음은 "뽀미도르" 입니다. 함경도 사투리에도 수용된 단어입니다.
사바까(Собака)는 개의 러시아어로 북한 정권 초기의 박씨 성을 가진 4명의 통칭인 "사박가(四朴家)" 에 대한 멸칭으로 쓰인 어휘입니다.
이런 것들을 열거하면서 이래도 서양언어에서 어휘를 빌려온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면 말해 보라고 좌중을 보고 일갈하니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북한의 언어와 문화를 다루던 그 수업에서 북한의 언어생활이 주체적이라고 주장했던 학생들은 학기가 끝날 때까지 저에게 어떠한 반론도 못한 채 그대로 기말시험을 맞이했고, 그들과의 인연은 그 강좌를 끝으로 끊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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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키
2022-11-09 20:13:30
그러고보니 최근에 김정은이 대성산 아이스크림 공장을 준설했다는 기사가 있었더랬죠.
거기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21세기에 고작해야 아이스크림 공장 따위를 국가 최고지도자가 친히 참석해서 치하한다는 웃기지도 않는 쇼맨십도 그렇지만, 어릴때 아이스크림은 북한말로 얼음보숭이 라고 한다고 배웠었는데 현실은 그렇게 조선어를 좋아한다는 그들이 아이스크림이라는 외래어를 대놓고 사용한다는, 어릴때의 상식이 정면으로 부정당하는 순간이었죠(...).
SiteOwner
2022-11-09 20:27:48
북한이 의기양양하게 뭔가를 보인다는 게 의외로 환상에 가려져 있었던 북한의 실체를 잘 밝힙니다.
말씀해 주신 아이스크림 공장 관련 건이 바로 그렇지요. 물론 아이스크림 공장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매출이라든지 파급효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보면 국가지도자가 나서서 치하할 레벨이라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미군이 전투원에 아이스크림을 공급하기 위한 전용의 공선을 운용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북한의 그 자랑스러움이 참으로 보잘것없어 보이기 마련입니다.
얼음보숭이도 사실은 억지로 만들어진 어휘로 금방 사어가 되었는데다 일설에 의하면 아예 아이스크림을 지칭하는 말도 아니고 빙수를 지칭하는 말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에스키모라는 어휘가 상당히 많이 사용되었다고도 합니다.
잡것취급점
2022-11-12 03:45:54
최근에 국방TV의 역전다방이라는 코너에서 태평양전쟁을 다루면서 미 해군의 아이스크림 공수작전에 관한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는데, 참으로 예나 지금이나 천조국의 무한에 가까운 보급능력 하나만큼은 전쟁사를 접할 때마다 새삼 혀를 내두르게 하더군요.
북한의 "얼음보숭이" 혹은 "곽밥" 같은 '문화어' 어휘가 정작 북한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들은 바 있고, 나무위키에서도 북한의 표준어라는 '문화어'의 보잘것없는 지위에 관한 글을 읽은 바 있습니다. 남북 간의 언어 차이에 따른 갈등을 염두에 두고 남북관계가 한창 좋을 때 남북한의 국어학자들이 모여 통일에 대비한 국어사전을 편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가 남북관계 악화로 흐지부지되었답니다. 이후 탈북자들 대상으로 이러한 움직임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설문조사를 했더니, 정작 다들 "북한말이 남한 표준어로 흡수되고 북한 주민들이 자연스레 남한 표준어를 사용하는 쪽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답했다는 게 기억나네요.
SiteOwner
2022-11-15 22:28:26
잡것취급점님의 코멘트에 대해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보급은 고대전에서도 현대전에서도 변함없이 필수사항입니다. 손자병법에 양불삼재(糧不三載)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본국에서 식량을 3번이나 조달하게 만들 정도로 전쟁을 장기간으로 끌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나타낸 것이고, 보급을 등한시했던 나라는 패하거나 비록 패배를 면하더라도 큰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에 변함이 없습니다. 가장 큰 문제가 제1차 세계대전의 영국으로 본국에서의 농업을 등한시하고 식민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면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다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작전에 고립되어 나라가 망할 뻔했습니다.
사실 끝에서 인용해 주신 탈북자들의 의견처럼 그렇게 되는 게 사실상 거의 유일한 정답입니다. 북한의 언어는 김일성 일가의 독재를 위하여 인위적으로 오염되고 왜곡된 것이라서 국어에 수용해야 할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