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ther Day at the Office - 하루하루 똑같은 날(정확히는 Same Shit Different Day의 좀 더 고급스러운 표현이다)
레스터 리Lester Lee는 택시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오랫동안 앉아서 도시 곳곳을 누벼야만 얻을 수 있는 황금같은 휴식 시간이었다. 사실 택시기사라는 직업은 경우에 따라 마음대로 휴식을 할 수 있었으나, 레스터는 휴식보다는 일에 무게를 더 달았다. 생활비와 집세라는 생존적인 문제를 제외하면, 그저 도시 곳곳을 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대도시는 시간과 날씨에 따라 무궁무진하게 변신했다. 마치 모네의 루앙 대성당 시리즈처럼 어느 날은 노을 때문에 붉은 꽃이 피기도 하고, 어느 날은 안개와 추위 때문에 겨울왕국이 되기도 했다. 뿐인가. 제각각의 목적을 띠고 레스터의 택시에 올라탄 사람들은 아주 소극적이거나 냉정한 부류를 제외하면 열이면 열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았는데 전부 다른 이야기였다. 그 소극적이거나 냉정한 부류도 끝끝내 버티다가 레스터의 혀놀림(?) 때문에 입을 열기도 했다. 그들은 레스터에게 훌륭한 기사나 소설의 소재거리가 되었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모두들 고민과 자랑거리가 하나씩 있는 법이니까. 무엇을 먼저 얘기하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레스터의 택시에 올라탄 사람들은 예외 없이 그 두 가지를 모두 지니고 있었다.
물론 레스터라고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택시기사일 때는 성질이 더럽거나 품행이 단정치 못한 사람이 올라타는 경우가 있었고, 그 중 최악은 역시 뭐니뭐니해도 권총 강도였다. 그나마 권총 강도는 자주 볼 일이 없어서 편했다. 레스터가 '친구'에게, 그도 아니면 회사가 '누군가'에게 얘기하면 전부 해결되기 때문이었다. 한 번은 레스터가 '친구'에게 그 강도가 어떻게 되었냐고 묻자, 사망 부고란 혹은 사건사고란을 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레스터는 그 '친구'가 고마우면서도 불편했다.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자신의 룸메이트인 것을 어쩌겠는가. 그리고 본인이 언급하지 않을 뿐이지, 레스터가 그 '친구'를 도와준 적도 엄청 많았다. 그것은 곧 레스터도 '무언가'에 물들었음을 의미했기에 종종 죄책감과 고민으로 괴로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대처법을 찾아낸 지금에 비하면 옛날 얘기였다.
"여어, 작가 형님 오셨군. 아니, 탐정 형님이라고 해야 맞으려나?"
"앞에 '삼류'란 말을 빼먹었어."
브로디 스트롱Brody Strong은 짐짓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하, 진짜... 자기혐오도 그 정도면 병이오, 형님. 진짜 정신과 한 번 가봐야 하는 거 아뇨?"
"때 되면 갈 거야."
"그나마 간다니까 다행이네."
브로디는 레스터의 끊임없는 헛소리를 여유롭게 받아넘겼다. 동양인인 레스터와 달리 브로디는 흑인이었고 나이가 어렸지만, 나이를 헛먹은 레스터에 비해 훨씬 어른다웠다. 그리고 고된 운전 중에도 미소와 여유를 잃지 않는 사람들 중 하나였기 때문에 다른 기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레스터는 브로디를 좋아했다. 그는 레스터가 즐거운 이야기를 하면 맞장구를 쳐주고, 슬픈 이야기를 하면 위로를 해주었다. 물론 그게 절대 빈말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지식과 경험 내에서 최선의 충고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절친한 동생이자 친구, 동료를 또 어디서 찾겠는가?
레스터는 그런 부끄러움을 감추려는지 브로디와 관련된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너 집에서 뭐 한다고 하지 않았어? 글쓰기였던가?"
"운전 끝나고 집에 가서, 맥주 두 캔 마시고 이것저것 써보고 있지. 그런데 더럽게 어렵더만. 어느 때는 내가 왜 이런 생고생을 하고 있는가 싶은 생각도 들고. 대답해 보쇼, 형님. 대체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는 거요?"
"재밌잖아."
브로디는 칠색팔색을 하며 손을 세차게 내저었다.
"염병하시는구려! 난 하나도 재미없던데! 형님네 나라에서 만드는 막장 드라마가 더 재밌겠소!"
"대체 무슨 이야기를 썼는데?"
"에, 그러니까..."
브로디는 젊은 나이에도 얼마 없는 곱슬머리를 긁적이며 기억을 떠올렸다.
"뭐 대충, 축구로 나쁜 놈들을 쳐잡는 슈퍼히어로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너 축구 잘 해?"
"아뇨."
"그럼 축구에 대해서는 잘 알아?"
"골키퍼만 공을 손으로 잡을 수 있다는 것까지만 아는뎁쇼."
레스터는 안경을 썼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구겨진 콧잔등으로 손을 가져가다 말았다.
"그러니까 네가 글을 못 쓰는 거야."
이번엔 브로디가 콧잔등을 구기며 따지듯이 물었다.
"그럼 형님이 쓰는, 미국 전역을 휩쓸고 다니는 킬러 조직에 대한 이야기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거요?"
"그런 걸 경험했으면 이 자리에 있지 않겠지."
"퍽이나 그렇겠소."
브로디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레스터는 자신의 '친구'가 방금 언급한 킬러 조직의 일부라는 사실을 매번 숨기느라 무진장 애를 써야 했다. 레스터는 그 '친구'의 심기를 거스르면 어떻게 될지 매우 잘 알고 있었기에 다른 건 몰라도 그 비밀만큼은 항상 지켰다. 하지만 그 '친구'는 워낙 용의주도한데다 의외로 아량이 매우 넓었기에, 레스터는 본인이 입을 잘못 놀려도 딱히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어쨌든 레스터는 브로디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었지만, 브로디는 그것도 모른 채 자신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흠칫 놀라며 말했다.
"아, 시간 됐다."
"무슨 시간?"
"조시랑 만날 시간이요."
"네 여자친구였지?"
조슬린 빈Joselyn Bean, 애칭 조시Josie는 천생연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브로디와 성격이 비슷했다. 그 브로디가 속상하거나 우울해질 때면 조시에게 찾아갈 정도라고 하니, 설명이 필요 없는 수준이었다. 레스터도 데이트를 하는 그들과 어쩌다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레스터는 그들을 볼 때마다 과연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했다. 레스터는 약간의 질투심 같은 것을 느끼며 농담을 던졌다.
"뭐, 바퀴벌레 한 쌍이서 잘 해 보시라고."
"염려 마십쇼. 조만간 미스터 앤 미세스 스트롱으로 다시 만나게 될 테니."
"신부 쪽 성을 따라가지 않아서 다행이구만."
"대체 언제적 캐릭터를 들먹이는 거요. 그러니까 형님이 영감 소리를 듣는 거야. 진짜 부탁하는데, 제발 정신 좀 차리쇼."
"눈물나게 고맙구만."
완벽하게 반격을 당한 레스터가 맥없이 대답했다. 브로디는 다 안다는 듯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자기 차로 돌아가며 말했다.
"어쨌든 글쓰기에 대해서 충고 고맙수. 슈퍼히어로는 때려치우고 연애소설을 쓸까봐."
"블로그에 올리면 병원으로 갈 사람이 수두룩하게 나올 거다."
"말 잘했수. 다들 상사병에 걸려서 애간장이 타버릴 거야. 어쨌든 난 갑니다!"
"난 화병을 얘기한 거였는데."
브로디는 레스터의 마지막 공격을 듣지도 않고 손을 흔든 뒤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레스터도 마주 손을 흔들어 주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뭐, 내 팔자가 늘 이런 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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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들의 소설에 비하면 분량이 많이 짧네요. 그나마 주제가 마음에 들어서 순식간에 썼습니다. 원래는 레스터와 존의 첫만남을 박진감 넘치게 쓰려고 했는데, 사실 첫만남이라는 게 보통 극적이지 않으면 안 되는지라 아이디어가 도저히 안 나오더군요. 그 전에 글쓰기 실력도 다 죽어서 못 버팁니다;;; 그래서 그냥 포기하고 일단 가벼운 일상 에피소드부터 쓰기로 했습니다. 역시 일상물은 부담이 없어서 쓰기 편하군요. 다만 다음 편은 존의 시점에서 쓸 생각입니다. 내용은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의뢰'를 처리할지, 단편 에피소드로 계속 연습부터 할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