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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력이란 용어의 함정

Papillon 2015.10.10 02:12:29
소설 관련 커뮤니티에서 흔히 보이는 표현들이 몇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표현을 하나 고르라면 “필력”이 있겠죠. 필력은 흔히 글 혹은 작가의 실력을 평가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평가자가 보기에 모범적인 글을 쓴 작가는 필력이 좋다고 표현하고 역으로 평가자가 보기에 부족한 작가들은 필력이 떨어진다고 표현하죠. 미묘하게 다르지만 비슷하게 쓰이는 표현으로는 문학성, 예술성 등이 있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굉장히 흔히 쓰이지만 전 그게 긍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전 이런 표현들을 쓸 때는 굉장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런 표현을 쓰는 사람 본인이 작품비평(좀 더 넓게 나가자면 미학이나 예술철학)이나 창작에 관심이 없다면 해당 개념을 어찌 사용하든 문제는 없어요. 하지만 본인이 창작이나 비평에 관심이 있고 창작 공부의 일환으로 작품을 평가하는 중이라면 해당 표현은 가능한 지양해야합니다. 이는 이런 표현들이 비평가를 함정에 빠트리기 쉽기 때문이에요.
“필력이 뛰어나다”라는 표현은 작가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작가의 실력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만약에 여기서 “필력이 좋은 작가는 뛰어난 작가다” 같은 대답을 한다면 순환 논법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잘 모르겠다. 그냥 내가 보기에 잘 쓴 글 같았다.”라는 주관적인 결론을 내어버린다면? 그러면 “이 작가는 필력이 뛰어나다”라는 발언은 자신의 취향에 대한 언급에 불과하게 됩니다. 일종의 말장난인 셈이죠. 이것이 개인적인 발언에서 언급된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이건 그저 자신의 발언을 더 멋들어지게 만드는 수사거든요. 하지만 본인이 해당 분야를 공부하는 중이라면 스스로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개념을 가지고 작품을 평가해놓고 “나는 이 작품이 왜 좋은지 이해했어!”라고 착각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천재가 아닌 이상 이런 사람은 절대로 성장할 수 없어요. 예를 들어, 어떤 요리사 지망생이(혹은 요리사가) 있다고 가정해보죠. 유명 셰프의 요리를 먹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인의 손맛이 느껴지는 음식이라고 평가했어요. 이걸 그저 타인에게 요리 추천하는 멘트로 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걸 본인의 요리 공부의 밑거름으로 삼는다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겠죠. 본인 스스로도 “손맛이 좋다”라는 게 뭔지 모르니까요. 이걸 처음에 깨닫는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이를 깨닫지 못하고 반복하면 결국 그 상태를 유지할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해당 셰프의 음식을 좋아할 뿐인 “만년 요리사 지망생”이 되는 거죠.
필력을 예시로 들었지만 사실 이는 다른 표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학성이 뛰어나다”라는 표현을 이해하려면 결국 “문학성이 무엇인가?”를 논해야 하죠. 그리고 문학성은 문학+성(性)이므로 문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답을 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앞에 언급한 것 같은 함정에 빠지게 되거든요. 이 함정에 빠지는 것을 달가워할 창작자는 얼마 없을 겁니다. 그런데 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함정에 빠져서 허덕이죠. 그렇다면 대체 이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할까요? 그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나름대로 “문학성”, “필력” 같은 표현들에 대해 확고한 정의를 내리는 거죠. 본인이 직접 정의를 내리지 못하겠다면 관련 서적들을 찾아보면 이와 관련된 논의를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가능하자면 해당 분야의 권위자에게 그 부분을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실제로 이런 두루뭉술한 표현을 즐겨 쓰면서도 해당 분야의 권위자이신 분들은 자기 나름의 정의를 내리신 경우가 많습니다. 그 분들에게 물어보면 해당 단어의 정의를 내려 주실 거예요. 물론 공감 여부는 이와 별개겠지만요.
첫째 방법이 너무 어렵다면 다른 방법은 그런 표현을 쓰지 않는 겁니다. “문학성”, “필력”과 같은 표현을 피하는 대신에 “이 작가는 어떤 포현을 즐겨 쓰는가?”, “캐릭터의 매력을 살리기 위해 어떤 방법을 썼는가?”처럼 평가자 스스로 이해할 수 있고 틀렸다면 쉽게 알아챌 수 있는 내용을 평가하는 거죠. 이런 평가들은 투박하지만 본인이 해당 분야를 공부하는데 훨씬 큰 도움이 되곤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