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72 및 T-90은 포탄이 수평으로 수납되고 T-64 및 T-80은 포탄이 수직으로 수납되는 차이가 있지만, 사실 원리는 대동소이합니다. 그리고 설령 포탑이 피탄되더라도 포탄이 차체 깊은 곳에 수납되어 있어서 유폭되어 탑승자 전원이 폭사하는 위험은 낮아집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소련전차는 일단 피격되면 포탑이 사출되고 승무원은 전혀 탈출하지 못해서 그 자리에서 폭사하고 마는 비극을 번번이 낳고 마는데, 왜 그럴까요?
문제는 포탄의 수납방식 및 캐로젤 오토로더의 데미지 컨트롤 부재에 있습니다.
자동장전장치 이외에도 예비탄을 휴행하기 마련인데, 그 예비탄을 어떻게 수납하는지가 크게 문제가 됩니다.
이 모식도에서 주황색으로 표시된 부분을 참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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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내 공간에 되는대로 저렇게 예비탄을 쌓아뒀는데 대전차무기가 특정방향에서만 날아오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만일 예비탄을 쌓아둔 구획이 피탄되면 그 순간 저 전차는 전차였던 고철이 되고 승무원은 폭사하여 사람이었던 자취조차 남기기 힘들게 되어 버립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저렇게 예비탄을 구비한다는 말은 자동장전장치에 장전된 탄약이 떨어지면 직접 손으로 채워넣어줄 필요가 있다는 것인데 그 사이가 막혀 있으면 사람이 접근하지 못합니다.
결국 이렇게 열려 있는 공간 바로 위가 탑승구획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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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장전장치의 외곽, 즉 이미지 좌측 하단에 예비탄이 있는 것이 보입니다.
게다가 러시아투데이(RT)의 워터마크까지 찍혀 있으니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나름대로는 데미지 컨트롤(Damage Control)을 위해서 저렇게 자동장전장치를 차체 한가운데의 깊은 공간에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운용에서는 예비탄의 수납문제가 있고 설령 그게 해결되었다고 해도 근본적인 방호수단이 부재한 이런 소련전차가 전투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은 게 이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소련전차를 비웃기에는 전기차의 데미지 컨트롤도 낫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비극입니다.
2022년 6월 4일 부산에서 있었던 한 교통사고가 전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전기차 충돌 3초만에 800도, 탑승자 탈출도 못하고 숨졌다 (2022년 6월 8일 조선일보)
이 사고에서 아이오닉 5 전기차는 톨게이트의 전방 도로분리벽과 충격흡수대를 정면으로 들이받고 직후에 3초만에 불길이 번졌습니다. 그리고 탑승자 2명은 탈출하지 못하고 차내에 갇힌 채로 사망했고 진화도 7시간이나 걸렸습니다. 가솔린을 연료로 사용하는 자동차도 충돌했다고 무조건 대화재나 폭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데 전기차의 경우는 이상하게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은데 그 이유는 구조를 보면 바로 추론가능합니다.
문제의 아이오닉 5의 차체구조는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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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dai releases deep dive into IONIQ 5’s features and production
아직 배터리는 내연기관에 쓰이는 가솔린, 경유, 액화천연가스(LNG), 액화석유가스(LPG) 등의 연료만큼 에너지밀도가 크지 않습니다. 특히 가스류의 경우 에너지밀도가 상온에서 액체인 연료보다도 낮다 보니 LPG를 연료로 쓰는 택시의 경우 트렁크 공간이 가스봄베에 점유당해 좁아진다든지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배터리는 더욱 사정이 좋지 않아서 탑승공간 바로 아래를 배터리 수납공간으로 써야 합니다.
어차피 시판되는 승용차가 방탄이나 방폭사양이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보니 이렇게 탑승공간 바로 아래에 배터리팩이 자리잡은 이런 신설계의 승용차에서 배터리팩이 발화하거나 폭발했을 경우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데미지 컨트롤 대책은 사실상 없습니다. 소련전차와는 달리 승객이 바로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는 구조인데, 실제로는 탈출하지 못하고 차내에서 끔찍하게 죽어가야 합니다.
게다가 언급한 사고 이외에도 전기차의 폭발사고는 흔히 보도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대책은 없습니다. 게다가 분쟁지역 이외에서는 거의 마주칠 일이 없는 소련전차와는 달리 이런 구조의 전기차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고 당장 이 동네에도 개인용 차량이든 택시 등의 영업용 차량이든 이런 형태의 전기차는 하루에도 몇 대 이상 보입니다.
가솔린을 사용하는 내연기관 자동차의 경우 연료탱크는 대체로 뒤차축 뒤에 자리잡고 있고 자동차의 외측한계와도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어서 어지간해서는 폭발할만큼의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전투기에 잘 적용되었던 셀프실링(Self-sealing) 기술을 이용하면 연료누출에 의한 폭발위험도 극적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연료탱크를 이중구조로 만들고 그 사이에 고무 등을 충진시켜 설령 손상되더라도 사이에 충진된 고무가 가솔린을 흡수하고 부풀어서 손상부위를 막는 이 기술은 이미 20세기 전반에 나온 옛 기술인데도 불구하고 최첨단 전기차보다 월등히 안전합니다. 물론 그 기술이 적용되지 않더라도 앞서 말한 이유 덕분에 폭발 자체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소련전차의 데미지 컨트롤이 형편없다고 비웃기에는 전기차의 것은 더 무모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게 과연 문명의 진보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