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ndom Encounter - 우연한 만남
"어우, 춥다."
레스터가 자동차 안의 히터 온도를 높이며 말했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 걸친 애매한 기간이기도 했지만, 추위를 잘 타는 레스터 입장에서는 4계절의 구분이 거의 의미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레스터도 생각 같아서는 남들처럼 강렬한 태양 아래서 서핑을 하거나 드높은 산맥에서 스키를 타고 싶었다. 하지만 민감한 피부와 체질이 그걸 허락치 않았다. 어차피 허락한들 성격 때문에 도전하지도 않을 확률이 높았겠지만 말이다.
"이번엔 커피 대신, 차(茶)라도 마셔 볼까."
레스터가 어두운 시외권을 등지고 시내 쪽으로 차(車)를 돌리며 말했다. 이런 날씨일수록 따뜻한 것이 끌렸으니까. 게다가 비는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지만 구름이 제법 껴서 답답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일수록 레스터는 커피를 마셨지만, 하도 마셔서 질렸다보니 다른 것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그... 이름이 뭐였더라? 루이비통은 아니고..."
레스터는 차의 품종 이름을 떠올리려고 노력하면서 안전하게 차를 느릿느릿 몰다가, 문득 강변다리의 저 먼 곳에서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걷는 데가 아니라 난간 위에 기다란 그림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레스터는 최악의 상황을 직감하고 얼른 차에서 내려 뛰어갔다. 가까워질수록 사람의 그림자라는 게 명확해지자 레스터가 급히 외쳤다.
"위험해요! 얼른 내려와요!"
Random Encounter: Arthur Nashly
레스터가 손을 흔들며 달려갔지만 난간에 올라선 그림자는 아무런 대답도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그것이 더 불안했다. 곧장 뛰어내렸을 경우 역시 곧바로 신고하면 되지만, 이렇게 무슨 돌발행동을 할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더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레스터가 더 가까이 가자 그림자가 미묘한 간격으로 늘어선 가로등 불빛을 받아 명확해졌다. 대학생처럼 간편하게 차려 입은 젊은 남성이었다. 그 남자도 레스터가 소리친 걸 들었는지 레스터 쪽을 바라봤지만, 막상 아주 평화로운 표정이라 도리어 레스터가 당황했다. 그가 말했다.
"아,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난간이 두꺼워서 떨어질 정도는 아니거든요."
"하지만!"
"애초에 떨어질 생각도 없었어요. 그냥 강변의 바람을 즐기고 있었을 뿐이지."
"그래도!"
"예예, 내려갈게요."
그는 레스터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는데도 의도를 충분히 이해했는지 난간에서 내려왔다. 더 정확히는, 가볍게 뛰어내렸다. 이 세상과 작별하려는 사람의 태도는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남자도 레스터의 심각한 표정을 보자 역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괜한 걱정을 끼쳐드렸네요. 그래도 한 번은 꼭 그러고 싶었어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거든요."
"아니, 왜요?"
"그게... 저도 이유를 모르겠어요. 참, 아서 내쉴리Arthur Nashly입니다."
내쉴리는 충동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듯이 통성명을 했다. 하기야 떠나갈 사람들은 이름조차도 의미가 없을 테니까. 레스터도 그 사람이 생각보다 제정신이라는 점이 다행스러워서 대답했다.
"레스터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고민이라도?"
"앞뒤가 막힌 느낌이에요. 쉬운 것 같기도 하고, 어려운 것 같기도 하고. 중요한 듯하면서도, 쓸데없는 듯하고..."
"실례가 안 된다면, 얘기해 보시겠어요?"
레스터가 내쉴리처럼 난간에 팔짱을 올리며 기대서자, 내쉴리의 표정이 조금 풀어지는 듯했다.
"뭐... 그러죠.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무언가가 계속 쫓아오는 느낌이에요. 그런데 그 무언가의 정체를 알아낼 수가 없단 말이죠. 물론 제 착각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 성격상 의문이 풀려야 안심이 되는데,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게 계속 쫓아오는 느낌이라 워낙 신경이 곤두서서..."
"그렇다면, 계속 쫓기다가 여기까지 몰린 건가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죠. 아,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죽으려고 그런 건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내쉴리가 오해를 풀려는 듯이 말하자 레스터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얼른 대답했다. 덕분에 내쉴리도 이해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드디어 본모습이 나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내쉴리는 불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죽을 용기도 없어요. 죽지 못해 사는 거죠. 그렇다고 살아가는 것도 무섭고... 그래서, 일탈 같은 걸 해보자는 의미에서 그랬던 거에요. 뭔가 이러면 머릿속이 맑아질 줄 알았죠."
"이해합니다. 위험하지만 않으면 되니까요."
레스터가 여러가지 의미에서 동질감을 느끼며 말했다. 레스터도 예전에, 어쩌면 지금도 비슷한 상황일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내쉴리만큼은 똑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았으면 했다. 레스터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좀 맑아졌나요?"
"딱히요. 하지만 이런다고 끝날 것 같진 않아 보이더군요. 그래도 와 주셔서 감사해요. 사실은, 누구라도 좋으니 하소연하고 싶었거든요."
"누구나 그렇죠. 다들 말 못할 사연이 있을 겁니다."
레스터가 표현에 주의하며 말했다. '너만 힘든 거 아니다'라고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내쉴리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내쉴리는 다시 속마음을 내비쳤다.
"하지만 이런 게 계속 반복된다니, 여러모로 지치는 것도 사실입니다. 언제까지 도망다니기만 해야 할지... 생각하고 싶지 않네요."
레스터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지금까지 잘 하신 겁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무언가에게 따라잡히지 않았잖아요. 그걸로 된 것 아닐까요."
"그런가요? 도망다니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결과가 좋으면 좋은 거죠. '쫓긴다'는 게 아니라, '잘 숨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가...?"
내쉴리는 예상 외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했다. 심사숙고하던 내쉴리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쁘지 않네요, 그거! 꼴사납게 쫓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적극적으로 살 길을 찾고 있었던 셈이었네요. 기사에 인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감사합니다!"
"에이, 별 거 아닙니다."
내쉴리가 깊게 감사를 표하자 레스터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내쉴리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말했던 건 사실이지만, 고작 그런 충고로 이 정도의 감사를 받자니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레스터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전 이제 돌아가 볼게요. 같이 타시겠어요? 어디 사시는지?"
"아뇨, 괜찮습니다. 잡생각이 사라져서 그런지, 기사를 어떻게 쓸지 슬슬 다시 생각나기 시작한 것 같거든요. 조언 감사드립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쉴리가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쾌활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하자 레스터도 위안을 얻으며 인사했다.
[ 코페르니쿠스 캠퍼스 대학신문 (11월 3일) ]
사설 - 우화 같은 인생, 인생 같은 우화
(전략) 물론 우화는 우화에 불과하다. 토끼는 어지간해선 사냥꾼에게 잡힐 운명이고, 방심하지 않으면 거북이보다 항상 빠르다. 하지만 그렇게 현실만을 강조하면서 비관적으로 살 것인가? 그렇게 치면 인간은 누구나 죽으며, 저승에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간다. 바로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오로지 자신만의 현실 때문이다. 그 때문에라도 우리는 역설적으로 현실에 비현실을 섞어야 한다. 우화 속의 동물들처럼, 자신이 주인공이 된 창작물처럼 비현실적인 무언가를 자신에게 부여함으로써 비관적인 현실에 맞서야 하는 것이다. (후략)
(편집자 코멘트)
본 사설은 특정 학과나 이념의 홍보가 아닙니다.
(추가 에피소드 12화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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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가 아파서 일찍 자려고 했습니다만, 생각난 김에 바로 써야겠다 싶어서 최대한 초기 구상을 까먹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적어봤습니다.
원래 이 아서 내쉴리라는 캐릭터는 추가 에피소드 중 '암살'에 해당하는 1회용 목표물로 써먹을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치면 (어디까지나 창작적인 의미에서) '죽여야 할' 악당들이 너무 많은데다 그만큼 유사점도 많아질 가능성이 있어서, 캐릭터는 남기되 암살이나 범죄와 관계 없는 쪽으로 재활용할 방법은 없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그럭저럭 잘 재활용한 것 같네요. 솔직히 '죽여야 할' 악당이 50명을 가볍게 넘어가는지라(…), 소재 낭비와 고갈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런 재활용을 적극 고려해 봐야겠습니다.
한편으로 내쉴리가 느꼈던 고민은 평소에 제가 느꼈던 내용 그대로이기도 합니다. 쫓기듯이 사느라 긴장과 부담은 천근만근이지만 막상 거기에 에너지를 다 쓰느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정말로 답 없는 상황이죠. 하지만 결국 생각하기 나름이랬던가요? '괜한 걱정'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최대한 마음의 안정을 찾는 단어나 이야기를 찾아봤더니, 그럭저럭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그 외에 레스터가 위로하는 내용에 대해, 처음에는 제논의 역설을 인용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적으면서 생각해보니 그래봤자 현실적으로는 아킬레우스에게 따라잡힐 것이기도 하고, 애초에 이 역설 자체가 수학적인 구조에서 성립하는지라 이야기가 복잡해질 것이 훤해서 결국 뺐습니다. 그 대신 쫓고 쫓기는 구도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이솝 우화로 대신했는데, 이것도 다행히 잘 써먹은 것 같네요. 마지막에 후일담격인 기사는 조금 인간 찬가가 과했나 싶기도 하지만요.
정말 오랜만에 적은 단편인데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거 알아?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유야 어쨌든 고독을 즐겨서 그러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계속 실망해서 먼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는 거야. - 조디 피코
5 댓글
마드리갈
2025-11-03 22:47:26
오랜만에 단편을 써 주셨군요. 그리고 요즘같은 세태에 충분히 가능한 에피소드라서 그런지 더욱 와닿네요.
사건은 정말 한 순간에 일어나기 마련이지만 그 사건의 여운은 길기 마련. 그게 어떤 형태로 끝나든간에 그러하죠. 그리고 레스터도 내쉴리도 정말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그리고 그 찰나의 사건이 좋은 영향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도 큰 수확이예요.
사실 제논의 역설이라는 건, 시간개념을 빼고 말하면 누구나 속기 마련이죠. 두 점 사이의 중간점을 건너는 소요시간에 미달된다는 조건을 빼놓고 말하니 제논의 주장이 헛소리인데도 그걸 효과적으로 반박할 수 없을 뿐.
Lester
2025-11-04 06:03:52
다른 추가 에피소드에 비하면 만나서 이야기를 한 것이 전부이기에 전개는 둘째치고 분량이나 채울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결말조차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 적절하다 싶은 내용을 적다보니 분량이 채워졌네요. 역시 창작은 머리보다 마음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내쉴리가 죽는 전개는 당연히 부담스럽기에 어떻게든 해피 엔딩을 내고 싶었는데, 그럭저럭 잘 해결된 것 같아서 다행이기도 하고요.
역설이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을 말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보니, 남을 설득할 때 쓰면 전혀 설득력이 없을 것 같더군요. 그래서 빼고 대체재를 찾아서 넣었는데, 이것도 생각보다 훨씬 잘 된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SiteOwner
2025-11-08 14:51:22
차와 루이비통의 혼동...갑자기 웃었습니다. 그 탓에 긴박하게 돌아가는 사안에 대한 충격이 더 커진 듯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 혼동된 것은 루이보스(Rooibos)인가 보군요. 콩과 비슷한 특유의 옅은 비린내를 빼면 꽤 좋은 대용차입니다만...
아무튼 누군가가 투신하는 상황은 안 일어나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진 인연은 나중에 어떻게든 예상치 못한 국면에서 꽃필 수도 있는 법입니다. 서로 격려를 주고 받았고, 레스터에게는 살아가는 의미를 재확인할 기회, 그리고 아서 내쉴리에게는 슬럼프를 탈출할 기회가 왔으니 다행입니다.
오늘이 있어서 내일이 있고, 또한 내일을 믿으니 오늘을 사는 게 아니겠습니까.
간만에 써 주신 단편, 뜻깊게 잘 읽었습니다.
Lester
2025-11-09 16:38:17
루이보스와 혼동한 게 맞습니다. 요즘 다니는 보드게임 모임에서 특정 커피(아마도 바닐라나 우유가 들어간 계통)가 설사를 유발하는 문제 때문에 대신 차를 마시고 있는데, 1위가 페퍼민트고 2위가 루이보스거든요. 개인적으로 홍차 느낌이 나서 종종 마시고 있고, 후각이 무뎌진 탓인지 비린내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추가 에피소드에서 만난 인연을 회수하는 추가 에피소드도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만, 대부분 일회성으로 계획했기에 어떻게 재회하는 모습으로 만들어야 할지는 하나도 정하지 못했네요. 그래도 인연 또한 코스모폴리턴의 소재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니, 잘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뜻깊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SiteOwner
2025-11-08 15:15:10
그리고, 묘사된 장면에서 떠오른 게 있어서 부가해 둡니다.
2021년 3분기 방영작 애니인 우리들의 리메이크(ぼくたちのリメイク)에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아래에 소개하는 영상의 2분 48초부터 나옵니다.
본작의 주인공 하시바 쿄야(橋場恭也)는 2016년 시점에서 도쿄에서 게임회사 근무중 회사대표가 잠적하고 회사가 공중분해된 탓에 실직하여 고향인 나라현으로 낙향해 버리고 마는데, 집에 도착해서 잠든 도중에 시점은 갑자기 10년 전인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원래는 진학하지 못했던 오오나카예술대학에 합격하여 진학하는 것으로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 전에 만난 카와세가와 에이코(河瀬川英子)는 처음의 2016년 시점보다 좀 더 앞선 시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으로, 그녀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교각에 기대에 있는 것을 보고 위기감을 느껴 몸을 던져 그녀를 저지하면서부터 인연이 생기고, 그녀가 부장으로 일하던 회사에 발탁된 쿄야는 정사원 승격을 목표로 일하는 도중에 프로젝트가 엎어져 버립니다.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도 역시 쿄야는 에이코를 만나게 됩니다. 어떤 여학생이 학생증을 떨어뜨리고 간 것을 쿄야가 주워서 전달해 주려 했는데 돌아보는 사람은 에이코. 쿄야는 처음의 기억을 그대로 가진 채로 그녀를 마주치자 "부장님?" 이라고 불렀지만, 2006년 시점에서 에이코는 쿄야와는 생면부지의 인물이었고, 부장님이라는 칭호를 동아리의 직책이라 생각했던 그녀는 "저, 어떤 부활동도 안하는데요?" 라고 반문합니다. 그리고 다시 타임슬립한 2018년 시점에서 쿄야와 에이코는 같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