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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터즈] Chapter 14: 불꽃. Episode 57

Papillon 2021.05.09 12:05:05

아직 하늘이 검게 물들지도 못했건만, 빈민가 한구석의 지상에는 불의 비가 유성우라도 된 것처럼 내렸다.

처음에 들리는 것은 천둥과 같은 한 줄기의 굉음. 그리고 그 소리가 한 번 울릴 때마다 사람의 형상을 한 불꽃이 터져나가 무지갯빛 환염에게 잡아 먹힌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보랏빛 갑주를 입은 한 사람의 사도.

마치 양 떼에 뛰어든 한 마리 늑대처럼, 자색의 사도는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불의 흡혈귀를 무로 돌려놓고 있었다.

그 모습은 실로 경이로운 광경이지만, 그것을 가까운 곳에서 보고 있는 에스텔의 표정은 가면 갈수록 어두워져만 갔다.

?

상황이 좋지 않아.’

?

언뜻 보기에는 그레고르가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도 불의 흡혈귀를 상대로 그레고르는 절대적인 우세를 보였다.

그러나 진짜 적은 불의 흡혈귀 따위가 아니다.

제스. 불의 흡혈귀를 부리는 화염의 사도.

녀석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화염의 기둥 앞에서 편안히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

그레고르가 불의 흡혈귀를 처리할 때마다, 녀석이 손가락을 한 번 튕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화염 기둥에서 태어난 불의 흡혈귀가 전선에 보충된다.

약하긴 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군세.

?

놈들을 무시하는 게 정답이겠지.’

?

제스를 노려야 한다.

전장을 살필 때마다 에스텔의 이성이 차갑게 속삭여왔다.

지금 당장 그레고르와 융합해야 한다고. 그 이후 잔챙이 따위는 무시한 채 제스를 베어버려야 한다고.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

아이들이 아직 여기에 있어.’

?

아이들은 여전히 소각로 위에 묶여 전시되어 있었다.

만약 그레고르가 불의 흡혈귀를 놓치는 바람에 녀석이 소각로 근처까지 도착한다면? 그 순간 거기에 남는 것은 아이들이 아닌, 그저 잿더미에 불과할 것이다.

?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

에스텔의 왼손이 움직일 수 없는 오른손을 대신해 검병을 움켜쥐었다.

수단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그것을 실행할 수 있다. 단지,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힘들 뿐.

?

아마도 오래 버티진 못하겠지.’

?

만전의 상태라면 모를까,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는 그리 오래 싸우진 못할 것이다.

길어야 5.

이 역시 낙관적으로 판단한 것일 뿐, 운이 나쁘다면 일격조차 버티지 못하고 패배할지도 몰랐다.

?

불리한 도박이다.’

?

하지만 가끔은 그런 도박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할 때가 있는 법.

?

그레고르, 제안이 있다.”

?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불의 흡혈귀 하나를 제거한 그레고르의 투구가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

놈을 가능한 한 멀리 끌고 가다오.”

?

그녀의 시야가 향한 곳은 제스의 등 뒤에 있는 불꽃의 기둥이 있었다.

?

전부 저기서 나왔다.’

?

처음에 대규모로 소환했을 때를 제외하면, 불의 흡혈귀는 전부 제스가 명령할 때마다 저곳에서 다시 쏟아져 나왔다.

?

녀석만 사라진다면 더는 증원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녀석을 끌고 가능한 한 멀리 가다오. 그렇게만 한다면 내가.”

?

남은 불의 흡혈귀 전원을 상대할 테니.

뒷말은 생략되었지만, 에스텔은 그레고르가 그 의미를 알아들었으리라고 판단했다.

제법 오랫동안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레고르는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해서 움직였고, 에스텔은 한 마디만 덧붙인 채 침묵을 이었다.

?

나를 믿어다오.”

?

짧은, 하지만 무거운 한 마디.

그 한 마디의 추가 판단의 저울을 움직인 것일까?

?

……알겠습니다.”

?

결국, 에스텔의 의견은 받아들여졌고, 그레고르의 다리가 기괴한 방향으로 변했다.

콰앙-!

이윽고 지축을 울리는 것은 거대한 한 번의 걸음. 그 발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그레고르의 신형은 한줄기 포탄이 되었다.

?

하하하! 멍청한 자식!”

?

나름대로 예상이라도 한 것일까? 그레고르의 신형을 예측하기라도 한 것인지 한 지상에서 솟아났지만, 불의 흡혈귀. 녀석들의 손은 곧장 그레고르를 붙잡고자 했으나, 그레고르의 전신에 솟아나 있던 무언가에 잘려 나가 소멸한다.

?

?!”

?

그것이 제스가 에스텔의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에 남긴 말.

이윽고 그레고르와 그는 에스텔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전장에는 그녀와 불의 흡혈귀들만이 남았다.

?

힘내라,”

?

입가에서 자신도 모르게 뱉어내는 작은 속삭임.

그레고르일지 자신일지. 대체 누구를 향하는 건지 모르는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에스텔은 넝마가 된 몸을 움직여 전장을 가로질렀다.

?

?

*** ***

?

?

역시 오래 갈 수는 없군.’

?

사람을 기준으로는 제법 먼 거리지만, 사도에게는 가까운 거리에 녀석을 떨어트리며 나는 화상으로 욱신거리는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환염과 사도의 갑주, 거기에 부분 둔갑으로 껍질을 만들어내 방어까지 했건만 불구하고 여기까지가 녀석을 붙들고 갈 수 있는 한계인 모양이다.

?

그래도 심한 수준은 아니야.’

?

이 정도라면 그리 오래지 않아서 완전히 회복할 수 있겠지.

고통을 최대한 억누르며 나는 시선을 틀어 비틀거리고 있는 거대한 갑옷을 보았다.

?

네놈, 어떻게 한 거지?”

?

자신이 판 함정이 부서진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일까? 녀석은 충격에 비틀거리면서도 연신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

그 녀석은 더 빨랐는데도 대응하지 못했는데.”

나는 빅토리아가 아니야.”

?

그 말과 함께 몸에서 우드득 소리가 나며 따개비 특유의 날카로운 껍질이 칼날처럼 솟아났다.

?

더 느리지만, 열기로도 능력이 봉인되지는 않지. 그 간단한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냐, 멍청이.”

이 자식이!”

?

살짝 도발이 섞인 내 말에 화가 났는지 녀석은 주먹을 휘둘렀지만, 비틀거리는 자세로 휘두른 주먹이 제대로 맞을 가능성은 없었다.

거기에…….

?

느려.’

?

같은 거구인데도 보어헤스 백작의 것과 비교하면 제비와 닭에 가까울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굳이 상형권을 쓸 필요도 없이, 단순히 사도의 신체 능력만으로도 피하는 것에 무리가 없는 수준.

?

빌어먹을 자식이!”

?

과연 빈민가의 암흑가를 지배하던 가락이 없어진 건 아닌지, 주먹이 통하지 않는 것을 알아내자 미친 듯이 불을 뿜어대는 제스. 하지만 그 역시 내 기준에서는 그리 위험하지는 않았다.

?

단순해.’

?

녀석의 불길은 뜨거웠다. 스치기만 한다면, 어떤 동물의 특징을 모방하던 순식간에 녹아내릴 것 또한 자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영향권에 들어갔을 때의 이야기.

단순히 공격을 위해 나를 노리고 뿜어진 불꽃 정도는 회피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거기에서 느껴지는 잔열 정도야 환염의 힘으로 쉽게 억누를 수 있는 정도.

물론 전방위 공격을 가한다면 그건 위험하겠지만.

?

이 정도로 느린 녀석의 공격을 맞을 이유가 없지.’

?

빅토리아가 녀석을 상대로 패배한 건 오롯이 극단적인 상성 열세와 부족한 실전 경험 때문이다.

보어헤스 백작이나 스테파니 씨가 언급될 필요조차 없었다. 블레어가 직접 나서도 이 녀석 정도는 그리 오래지 않아 피떡이 되어서 사라지리라.

하긴 그럴 수밖에 없나.’

?

제길 어째서냐!”

?

나는 버려진 쓰레기를 보는 것 같은 차가운 눈빛으로 씩씩거리는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

분명 그 계집보다 내가 강했을 터인데!”

네가 강해?”

?

나는 코웃음을 치며 단 한 걸음의 발걸음으로 녀석의 틈으로 파고들어 양팔을 잡았다.

?

!”

?

당황했는지 바둥거리는 녀석.

분명 제대로 된 사도라면 전신 어디로든 불을 뿜을 수 있을 테지만, 팔이 잡히자 녀석은 그저 당황할 뿐이다.

?

미안하지만 너는 약해. 아니, 약할 수밖에 없지.”

?

그런 녀석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작은 목소리로 녀석의 귓가에 속삭였다.

?

너는 계약을 하지 못했으니까.”

?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빅토리아를 쓰러뜨렸다는 사실에 정체도 모른 채 불을 다루는 사도라는 사실만 파악했다.

하지만 녀석의 이름을 듣게 된 순간, 이드라 님은 무언가 의아하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

[이해가 가질 않는구나.]

?

그것이 녀석의 이름을 듣자마자 이드라 님이 나에게 전한 말.

?

[크투가는 결코 그런 인간과 계약을 하지 않을 터인데?]

?

크투가. 화염의 신은 이드라 님이 말씀하시길 결코 제스와 같은 악인과 계약할 존재가 아니라고 하셨다.

물론 이타콰처럼 사도야행을 포기했을 수도 있지만.

?

그렇다고 해도 이상해.’

?

이타콰는 사도야행을 포기했지만, 자신과 파장이 맞는 사도를 찾았다. 하지만 크투가는 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본래라면 여기서 추리는 끝나야 할 터. 하지만 그림자와 만나본 나로서는 한 가지 떠오르는 가설이 있었다.

?

만약 그 그림자 녀석이 사도의 힘을 강제로 부여할 수 있다면?’

?

그렇다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그리고 그 가설은 녀석의 투구를 본 순간 확신이 들었다.

?

검은 투구인가…….”

?

같은 검정인데도 불구하고 밤하늘처럼 아름답지는 않은, 마치 강제로 오탁을 덧칠해 내 만들어낸 것 같은 부자연스러운 칠흑.

?

언젠가 복수해 주마.’

?

-!

그때 본 재수 없는 그림자의 모습이 떠오르자, 무심코 평소보다 주먹을 강하게 내질렀다.

?

, 죽여, 감히,나를!”

?

역시 제법 충격이 있었는지 비틀거리며 말을 증오에 가득 찬 말을 토해내는 녀석. 그 목소리에는 여전히 후회 같은 건 느껴지질 않았다

?

감히?”

?

다시 폭력의 연쇄가 시작된다.

?

무술 따위는 쓰지 않아.’

?

그건 에스텔에게 배운 소중한 추억이다. 이런 놈에게 쓰기에는 지나치게 아깝다.

?

네가 특별하다고 생각해?”

?

단순한 주먹질에 팔이 부러져 나간다.

?

네가 선택받았으니 뭐든 해도 된다고 여기는 거냐?”

?

발차기를 막기 위해 든 팔이 으스러졌다.

?

다시 한번 말해주지.”

?

공격을 막기 위해 지옥 같은 불길이 치솟았지만, 가벼운 스텝만으로 범위에서 벗어났다.

?

너는 약해. 튼튼한 걸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약해.”

?

한 번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낫 모양으로 꺾이는 녀석을 보며 나는 그렇게 속삭였다.

?

우리는 특별하지 않아. 그저 우연히 기회를 잡은 사람이지.”

?

특별해지고 싶어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쿠엔틴 그 노인네가 나에게 한 말. 당시에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분노와 당혹감만 느꼈지만, 그 뜻을 쓸데없는 자리에서 깨달아버렸다.

?

조금 후회할 마음이 드나? 빅토리아와 에스텔, 아이린 수녀와 아이들에게 사과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

3분 정도.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동안 이어진 구타조차 견디지 못한 녀석을 보는 내 눈빛에는 이미 감정조차 깃들어있지 않았다.

?

그래, 알겠다.”

?

한참 고통 때문에 숨을 고르던 녀석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

끝이로군.’

?

그 모습에 드디어 에스텔에게 돌아가도 되겠다고 내가 판단한 순간.

?

네 놈을 망가뜨리려면 그 암캐부터 조져야 한다는 사실을!”

?

콰앙-!

폭음과 함께 주변을 밝히던 빛이 사라졌다. 소리의 진원지는 조금 전 녀석이 있던 장소에 있던 불꽃의 기원.

?

뭐지?”

?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 같은 불꽃 기둥은 사라졌지만, 대신에 그 자리에는 사도보다 살짝 약한 수준 정도로 강력한 무언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

제길!”

?

에스텔이 위험하다.

그 생각에 내가 자리를 비우려고 하는 순간, 뜨겁게 달아오른 팔이 내 발목을 잡았다.

?

못 간다!”

?

이미 고철이나 다름없이 망가진 투구 사이로 녀석의 광기에 찬 눈동자가 모습을 이글거렸다.

?

!”

?

녀석을 떨쳐내기 위해 몇 번이고 발을 차보지만, 독기가 가득 찬 녀석의 팔은 풀릴 줄 몰랐다.

?

빌어먹을!”

?

에스텔에게 가야 하는데!

그렇게 내가 녀석에게 벗어나려고 난동을 부리는 순간.

푸른 칼날이 하늘에 보일 정도로 치솟았다.

?

?

*** ***

?

?

뭐냐 저건?’

?

에스텔은 눈앞에 광경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레고르가 제스를 끌고 가 사라진 이후, 에스텔은 치열히 싸웠다. 가뜩이나 만신창이나 다름없던 몸은 이제 움직이는 것이 신기한 상황으로 몰렸지만, 그래도 검을 멈추질 않았다.

그렇게 지난 시간은 3.

객관적으로 보아서는 그리 길다고 할 수 없지만, 영원과도 같은 사투는 불의 기둥과 불의 흡혈귀들이 사라지면서 끝을 고했다.

그랬기에 안도하고 있었는데…….

?

이건 뭐지…….’

?

그것은 불로 벼려낸 혐오감이었다.

살아있는 홍염이 마치 살아있는 고깃덩이처럼 뭉쳤고, 그 표면에서 녹아내리는 인간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괴한 것은 그 거대한 몸체를 근원으로 해 만연한 촉수.

?

꺄아아아아아!”

?

각각의 촉수에는 불타오르고 있는 사람이 박혀 있었다. 이미 사람 형상의 숯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지만, 눈과 입가에서 피 대신 불을 토하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촉수에 달린 얼굴들은 에스텔이 상대한 불의 흡혈귀들의 얼굴과 일치하고 있었다.

?

설마 그래서?”

?

불의 흡혈귀를 상대하면서 에스텔은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어떻게 제스는 끊임없이 흡혈귀들을 충원하는가? 마찬가지로 괴물을 다루던 블레어는 그 한계가 명확하지 않았나?

그 해답이 지금 여기에 있었다.

?

모두 한 마리였다고?”

?

불의 흡혈귀는 군단이 아니었다.

그저 하나.

에스텔이 상대하던 인간형 불의 흡혈귀는 그 괴물의 촉수 중 하나에 불과했다.

?

이길 수 없어.’

?

무인의 감각이 에스텔에게 경고했다.

저것에서 느껴지는 힘은 사도에 비하면 약할지언정 그 그림자조차 능가하고 있었다.

물론 녀석처럼 기괴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녀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표는 그녀와 소각로에 있는 아이들.

?

피할 순 없어.’

?

그 적은 달라졌을지언정 해야 하는 일은 변치 않았다.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 이대로 피했다가는 아이들은 그저 잿더미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기에 부족한 몸으로 전력을 다했으나 결과는 최악이었다.

?

커억!”

?

고작해야 몸부림에 불과했다.

마치 소가 꼬리를 휘둘러 파리를 쫓는 것처럼 단순한 움직임에 불과했다.

그런데 막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방어 자세는 취했지만, 마력 칼날이 녹아내리면서 왼쪽 어깨를 꿰뚫렸다.

?

빌어먹을.’

?

시야를 돌리자, 어깨가 통째로 증발해 피부 한 장에 의존해 덜렁거리는 왼팔이 보였다.

?

검을 휘두를 수 없어.’

?

오른팔이 망가져서 왼팔로 검을 휘둘렀건만, 이제는 차라리 오른팔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가 되었다.

?

어떻게 해야 하지?’

?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도망치는 것이 옳은 판단이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녀, 에스텔은 기사. 그렇기에 지켜야 할 이들을 놔두고 도망갈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

나는 정말로 기사인가?’

?

문득 그런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그것은 그녀를 구해줬지만 그리 달갑진 않던 이가 한 발언. 그리고 그레고르의 모습을 보고 그녀가 인정한 사실.

?

소여를 나온 나는 기사인가?’

?

그녀가 기사가 된 이유는 소여에서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에스텔은 그렇게 되어야만 했고,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배웠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소여를 나왔다. 그리고 더는 가문이 아닌 자신을 위해,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

그러면 나는 뭐지?’

?

-!

불꽃이 터져 나오며 에스텔의 신형이 하늘을 날았다.

이번에도 남은 것은 중상.

이미 망가진 몸 위로 계속해서 상흔이 추가되어 가는데 그녀의 머리는 이상할 정도로 맑았다.

?

나는 왜 검을 들었지?’

?

그리고 떠오르는 것은 근본적인 의문.

?

나에게 무라는 것은 뭐지?’

?

마치 안개 속에서 헤매던 것 같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

그레고르,’

?

첫 만남은 그리 좋지 못했던 사내.

그렇지만 이후 함께 싸우며 우정을 쌓은 전우.

자신을 가문의 속박에서 구해준 남자.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

그와 함께 있고 싶다.’

?

그레고르의 옆에 서서 함께 싸우고 싶었다.

?

기사가 아니어도 좋아.’

?

그저 에스텔로서 그의 곁에 서고 싶었다.

그저 자기 자신을 위해.

?

나 자신을 위해!’

?

-!

다시 한번 불꽃의 촉수가 그녀를 노렸지만, 그녀의 오른팔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막아내고 있었다.

거기에 평소에 그녀가 들던 마력검은 없었다.

그저 주머니처럼 덜렁거리는 왼팔은 유감스럽게도 마력검을 놓친 지 오래다.

하지만 그런데도 촉수는 너무나도 쉽게 막혀 있었다.

우웅-!

오른손에는 순수하게 빛으로 만들어진 검이 들려, 촉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내고 있었다.

순수 마력검.

과거 그녀가 금단의 비기를 사용할 때만 한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던 궁극의 기예. 그것이 숨을 쉬는 것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

나는 에스텔이다.”

?

그녀의 입가가 달싹였다.

?

귀족 영애도 기사도 아닌 에스텔이다.”

?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각성.

단 한 순간의 깨달음으로 인한 마도기사의 급격한 성장. 그것이 지금 에스텔에게서 일어나고 있었다.

?

하압!”

?

망가진 팔이 움직이며 빛의 검이 휘둘러진다.

목표는 저 불쾌하기 짝이 없는 괴물.

?

에스텔 식 비기. 불을 먹는 새.

?

그렇게 칼날은 섬광이 되어서 불길을 잘랐고, 하늘에는 한 줄기 푸른 검흔만이 새겨졌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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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깐 설정 이야기

마법 유파 중 마도기사의 설정은 무협에 나오는 무림인이 기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소위 무협지에서 무림인이 단순히 인식을 바꾸는 것만으로 무섭게 강해질 수 있는 것처럼, 에스텔도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으로 갑작스럽게 성장한 것이죠. 요컨대 너 자신을 알라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까요?

?

Act 2에 나온 다른 주요 조연 캐릭터로는 로즈마리와 소여 백작이 있겠군요. 이 둘은 조연급이라서 외모 설정을 자세히 잡아두진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베이스가 된 이미지는 존재합니다.

?

로즈마리의 경우 베이스가 된 캐릭터는 연희 시리즈(연희무쌍)”의 감녕(이미지 링크 #)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감녕이 한 30대 중반 정도로 나이를 먹으면 변하게 될 이미지라는 생각으로 만들었습니다.

?

소여 백작의 본래 이미지 베이스가 된 캐릭터가 따로 있었는데, 이후 제가 생각한 외모와 일치하는 캐릭터가 등장해 수정했습니다. 바로 도타: 용의 피의 등장인물인 케이든(이미지 링크 #)입니다. 에스텔의 아버지인 만큼 나름 미남이긴 하지만, 그 인격은 그리 좋지는 못하죠. 어찌 됐든 상관없는 사실을 알려드리면, 사실 젊은(혹은 어린) 소여 백작은 흔히 생각하는 이상적인 기사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사도야행에서 일어난 일로 성격이 바뀌어버렸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