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Z백화점 8층의 대형 오락실 ‘RZ 게임플렉스’. 여러 사람들이 열심히 게임에 집중하는 가운데, 한쪽에서 두 사람이 열심히 게임에 집중하고 있다. 친구들로 보이는 몇 사람도 함께 구경 중이다. 한 사람은 청커버 재킷을 입은 키가 큰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정도의 남자, 또 한 사람은 빨간 점퍼를 입은 금발 꽁지머리의 키가 160cm 정도 되는 초등학생. 두 사람이 하고 있는 건 슈팅게임 ‘버블슈터 팝’. 새총으로 여러 가지 버블 캐릭터들을 쏘아 날리는 게임이다.
“아윽, 졌다...”
금발의 초등학생이 탄식 소리를 내며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쉰다.
“졌을 리가 없는데...”
“하하하, 봐봐.”
키 큰 남자가 초등학생에게 화면을 보여 주며 말한다.
“여기 점수가, 네가 졌다고 말해 주고 있잖아? 이거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어?”
“아니, 시로 형, 그건 내가 조작을 잘못 해서...”
“자, 민이 너, 확실히 졌으니까, 약속대로 이거 입는 거다.”
시로라고 불린 남자는 쇼핑백에서 뭔가를 살짝 보여준다.
쇼핑백에 들어 있는 건 바로...
세일러복이다!
그것도 핑크색의 반팔과 미니스커트 세일러복, 거기다가 매우 짧은!
“신체 사이즈도 맞춰서 가져왔어. 다음에는 입어 달라고?”
“으...”
민은 싫다는 듯 머리를 싸맨다.
“약속은 약속이잖아?”
시로는 웃기까지 한다. 확실하다. 이미 상상하고 있다, 시로는!
“으으으...”
친구들 앞에서 이게 무슨 낭패란 말인가... 민은 머리를 싸맨다.
바로 어제였다. 늘 민 자신과 경쟁해 오던 ‘리네네’라는 유저가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것 말이다. 그게 바로 시로였다.
민과 시로는 나이 차이는 좀 있었지만 웬만한 아는 사이 이상이었다. 시로는 민의 누나 반디의 대학 후배로, 평소에도 좀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가 서로 취미까지 비슷하다는 걸 알고 나자 더 친해졌다.
민이 평소 즐겨 하는 게임은 ‘버블슈터 팝’이다. 새총으로 다양한 색깔의 물방울을 쏴서 구조물을 무너뜨리는 단순한 방식의 게임이다. 오락실에서도 할 수 있고 PC방에서도 할 수 있고 폰에서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아레나 시스템으로 경쟁도 가능하니, 여러 유형, 다양한 연령대의 유저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아레나의 랭킹 시스템은 경쟁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거기서 쓰는 민의 닉네임은 ‘비타민MM’. 비타민MM은 거기서 항상 상위권을 놓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리네네라는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처음 리네네와 맞붙은 건 사흘 전이었다. 그때는 무엇도 모르고 그냥 했는데, 그야말로 겨우겨우 이겼다. 평소에 맞붙는 도전자 정도는 보통은 그냥 여유롭게 이겼는데, 리네네는 첫 대결부터가 달랐다. 두 번째 리그인 다이아몬드 리그에서 최상위 리그인 전설 리그에 막 올라왔을 텐데, 딱 몇만 점 정도 차이로 이겼다. 보통 민이 상대방을 이길 때의 격차의 1/10도 안 되는 격차였다. 그래도 그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문제는 그다음 날부터였다. 그때는 오후 3시 30분, 막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던 길에 아레나 한 판을 했다. 버블슈터 팝의 아레나는 보통 5분 정도면 끝난다. 그 5분이 10분, 아니 1시간처럼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어찌나 시간이 길게 느껴졌던지, 100m 정도의 거리가 1km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집 대문까지 와서 나온 결과는 패배.
그것도 너무나도 아쉬운, 하나만 잘 던졌어도 이길 수 있었던 패배라서, 더 뼈가 아팠다.
대문 앞에 서서도 민은 바로 들어갈 생각은 나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 눈앞에서 놓쳐 버린 승리만 생각날 뿐이었다. 집앞에서 푹 한숨을 쉬고 있는데...
“야! 민아, 뭐 해?”
누나 반디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민은 신경도 안 썼다. 아니, 들리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야, 독고민, 안 들어와?”
“어, 누나, 어느새...”
“왜 문 앞에서 그러고 있는 거야?”
“아... 아니야.”
“그럼 빨리 들어와!”
반디가 더 재촉하자 민은 털레털레 집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라면 대학원 연구실에 가 있어야 할 누나가 왜 오늘은 집에 있는 건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자기 방에 들어간 민은 하도 열이 받았는지 방 안의 침대, 책장 안의 책들, 그 외에 옷장 같은 걸 염동력으로 전부 뒤집어 놨다. 물론 곧바로 원래대로 해 놓기는 했지만.
그날의 충격은 잠을 자기 전까지도 쉬이 없어지지 않았다. 방 안을 온통 뒤집어 놓은 다음으로는 겉으로는 드러내지는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슴 한켠에 불이 타오르는 듯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다음 날도, 민은 그 리네네와 아레나에서 또 만났다. 역시나 그때도 또 졌다. 심지어 그때는 거의 더블스코어에 가깝게 졌다. 더블스코어라니, 더블스코어라니! 민에게는 정말 악몽과도 같은, 잊히지 못할 끔찍한 기억이었다.
민을 좌절하게 한 강력한 경쟁자 ‘리네네’를 실제로 만난 건, 그 이틀 후였다.
그날은 웬일인지 리네네의 도전이 없어서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하굣길에 집에 들어가다가, 친구 유와 료를 만났다.
“어? 민아, 집에 가?”
“어... 어.”
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너네 집에서 놀자!”
친한 친구들인데 거절할 리가 있나. 민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고, 셋은 함께 민의 집으로 향했다. 대문과 정원을 지나, 현관을 들어서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족의 목소리는 아닌데, 그렇다고 처음 듣는 것도 아닌 목소리.
“하하하, 잘 지내죠, 선배님.”
“그래, 이번에 RZ케미컬에 입사하게 됐다고?”
“아, 아직 확정된 건 아니고, 최종면접 결과만 남았어요. 그런데 아마 될 것 같네요.”
저 목소리는 분명 시로. 반디의 대학 후배다. 민과도 몇 번 봤던 사이.
“응? 시로 형?”
“민이 맞지?”
시로는 민을 보고 싱글싱글 웃었다.
“오랜만이네. 왠지 모르게 즐거워 보이는 것 같은데...”
“요즘 이런 걸 하고 있거든.”
시로가 보여 준 건 폰에 있는 게임.
화면을 딱 보자마자, 민은 깨달았다.
시로가 하고 있는 게임이, 버블슈터 팝이라는 것!
하지만 더욱 민을 놀랍게 했던 것. 그건 바로...
시로가 리네네였다!
두 번이나 민을 좌절하게 했던 리네네는, 바로 시로였다!
급히 민은 폰 화면을 숨기려고 했지만, 이미 시로의 눈에도 ‘비타민MM’ 닉네임이 들어온 상태였다...
“호오, 이거 재미있게 됐네.”
“뭐... 뭐가...”
시로는 당황하는 민을 보고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인다.
“내가 재미있게 대결한 상대가, 설마 너일 줄이야.”
“아니, 왜 시로 형이 리네네인 건데!”
“내기 하나 할까?”
“무슨 내기?”
“버블슈터 팝, 오락실 연결도 되는 거 알지?”
“아... 알지.”
“좋아. 내일 RZ 게임플렉스에서 만나. 거기서 아레나 대결을 해서 이기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 어때?”
무슨 오기였던지, 민은 절대 질 수 없다는 생각이 딱 들었다.
“좋아.”
“그래.”
시로는 만족한다는 듯 웃고는 뒤에 앉아 있는 유와 료를 돌아봤다.
“너희들, 들었지? 내일 시간 되면 오락실에 우리 하는 거 보러 와!”
그렇게 해서 민은 다음 날 RZ 게임플렉스에서 시로와의 대결에서 졌고, 벌칙으로 분홍색 세일러복을 입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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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아 올리는 단편입니다.
소재는 호불호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저는 쓰는 내내 대만족이었습니다.
다음 화는 내일 올라갈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