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8시, 예담의 집. 아까 블라디미르와 싸웠던 건 금세 다 잊기라도 했는지, 저녁식사까지 다 하고 나자,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컴퓨터를 틀어 놓고 음악도 틀고 인터넷 방송 하나를 보기 시작했다. 의외로 시간은 잘 갔다. 그리고서 방송이 쉬는 시간, 자기 방에서 나와서 화장실에 가려다가, TV에 눈길이 간다. 예담은 TV에 나오는 사람의 얼굴을 바로 알아본다.
“이야, 우리 학교 그 선배님이 나온 방송인 건가?”
예담의 눈에 들어온 건 잔카를로와 마주 선 라프레사의 멤버들. 그 중에도 코하쿠가 잔카를로에게 바로 지목되어, 무언가 미션을 수행하기라도 하는 듯,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거기에 MC의 입담이 압권이다.
“네... 코하쿠 양, 어쩔 줄 몰라하는군요! 하긴, 예술, 그것도 초현실적인 예술을 마주 보고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이 상황에서 코하쿠 양이 할 수 있는 것은?”
마침 그 상황은, 일요일에 예담이 겪었던 것과 같이, 잔카를로의 능력에 의해 무대 한가운데 멈춰지고, 옆에 있는 도화지에 내면을 그린 것과 같은 그림이 묘사되는 상황이다. 코하쿠의 심리는 어떤지 알 수 없겠으나, 예담에게는 매우 좋지 않았던, 그런 경험이다.
“어디, 그런데 저 사람 후기를 안 봤는데...”
곧바로 잔카를로의 전시에 대한 후기를 찾아서 보니, 대체로 만족스러운 반응이 많았던 듯하다. 이런 것 역시, 예담은 얼른 이해하기는 힘들다.
“이해할 수 없네. 예술이라는 건... 일종의 ‘나만 당할 수 없다’는 건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건가...”
머리를 좌우로 가로저으며, 채널을 돌리려 한다. 그런데, 거실 한쪽에서 운동하고 있던 예성이 예담을 막아선다.
“잠깐, 그거 돌리지 마! 내가 볼 게 있는데!”
“응? 뭘 본다고?”
예담은 예성이 이런 걸 좋아한다는 소리는 못 들은 모양인지, 예성의 그 말에 ‘의외’라는 반응을 보인다.
“형 아이돌 나오는 방송은 안 좋아했던 것으로 아는데.”
“그러니까 내가 이걸 보려고 틀어 놓은 거라고! 왜 멋대로 형 허락도 없이 채널을 돌리려고 하는 거야!”
예성은 그렇게 우겨 가며 예담이 잡은 리모컨을 기어이 뺏는다. 예성은 ‘하’ 하면서 한숨을 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막 책상 앞에 앉으려다가, 컴퓨터를 보니, 한 메시지가 예담의 눈길을 멈추게 한다.
“뭐야, 또 메시지가 왔네...?”
그건 민에게서 온 메시지다. 웬 마스크 사진을 달랑 보내 놓고, 거기에 ‘이거 알겠어?’라는 말을 적어 놨다.
“에이, 이러면 내가 어떻게 알아...”
그렇게 말하려다가, 예담은 그 마스크를 본 적이 있다는 걸 문득 깨닫는다. 이빨 문양이 있는 마스크를 모를 리가 없다.
“맞아... 저 마스크, 봤던 것 같아. 그런데 어디서 봤지...?”
예담은 떠오려 보려고 하지만, 거기까지는 쉽게 생각이 안 난다.
그리고 그 시간, 동구에 있는 재개발 지구의 모듈형 주택 단지.
리암은 자신이 조금 전에 보고 온 것을 믿기 힘들었는지, 계속 그 너머에서 보이는 광경을 지켜본다.
“라티카가 이런 것까지 한다고... 이거 그냥 뒀다가, 전에 봤던 영상에 나오는 그 갱단처럼 되는 거 아닌가?”
라티카가 사는 그 단지에서 들린 말은 리암의 귀를 의심하게 할 만하다. 행인의 물건을 훔치는 건 이상하다고 할 것도 없고, 리암이 들은 것 중에는 리타카와 ‘동생들’이 초능력으로 사기를 벌이자는 말도 있었다. 더 들으려다가 머리가 아파진다. 리암은 발걸음을 돌리려 한다. 하지만 무슨 생각이 든 건지, 이윽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리암. 너는 이미 싸움을 하고 있잖아. 거기에다가 선배님도 잃었고! 고작 이런 것 때문에 쫄기는...!”
하지만 리암은 지금 도와줄 사람 하나 없이 혼자다. 잘못 행동했다가는 볼트처럼 될 수도 있고, 또 그게 아니라도 혼자서 행동하는 건 위험하기도 하다.
“잠깐... 여기, 위치가...”
딱 보니, 진리성회 동부회당 근처다. 리암의 가슴이 순간 철렁거린다. 심호흡을 하고서 리암이 둘러보던 중,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그것은 주머니 안에 있었다. 한 달쯤 전에 레이시에 갔다가 한 이레시아인의 가게에서 산 스프레이 캡슐인데, 한번 뿌리면 하루를 가고, 특수한 안경을 쓰면 그 스프레이가 보여서 추적이 가능하다고 했다. 물론 그 가게 주인에게 듣기만 한 거라, 주머니에서 그 캡슐을 꺼내고는, 곧장 그걸 라티카가 사는 모듈형 주택 쪽으로 던진다.
“시간은 3일 정도 간다고... 이게 좀 잘 작동해 주면 좋겠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리암은 그 가게에서 같이 산 고글을 써 본다.
“즉시 나타나는 변화는 없나 보네... 좀 기다려야 하나?”
하지만 거기서 죽치고 있어야 할 시간적인 여유 또한 리암에게는 없다. 그 스프레이 캡슐의 성능을 믿어 보기로 하고, 일단 리암은 그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 시간, 진리성회 제1성지 진리궁의 지하실. 로마노와 다른 처단조원 몇 명, 그리고 강사 한 명이 막 들어온 참이다. 로마노의 시선은 웨이신에게 먼저 간다.
“어디, 오셨는가?”
웨이신은 지하실로 들어오는 처단조원들을 보고서 다들 들으라는 듯 말한다. 그걸 들은 로마노가 가소롭다는 듯 말한다.
“네 녀석에게 좋은 소식은 없다. 오늘은 우리의 위신을 잘 살렸거든.”
“그 말은...”
웨이신의 말이 순간 흔들리자, 로마노는 그걸 놓치지 않고 말한다.
“그래, 네 녀석 역시도 유예되었을 뿐인 운명이지. 네 녀석이 그 계좌이니 뭐니 하는 말만 지껄이지 않았어도...!”
“그나저나, 총회장님은 얼른 자기 비밀계좌의 위치를 알고 싶지는 않은가 보구나. 지금쯤 어느 의원님에게 줄 돈이 궁할 텐데. 상원의원이었던가? 아니면 누구였더라...”
웨이신이 자신을 자꾸만 긁자, 로마노는 다시 웨이신을 노려보며 말한다.
“이 자식, 뭐야!”
“내 말이 혹 틀렸다는 거냐? 그러면 죽여도 좋다. 그런데, 그러면 내가 한 말을 영원히 증명할 수 있을까?”
로마노는 그 말에 반박하거나 하지는 못한 채, 웨이신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일말의 자신감은 있는지, 주먹까지 들어 보이며 말한다.
“명심해라. 유예되었을 뿐이다. 무슨 말인지는 네 녀석이 잘 알겠지.”
그렇게 말하고서 지하실을 나서려던 로마노는, 이어 들려오는 소식에 한숨을 푹 쉰다.
“에이- 동부회당 녀석들, 뭐 이렇게 시원찮아! 총회장님 하신 말씀 반의 반도 못 따라오는 거지!”
로마노의 그 말을 들은 웨이신은 별말은 하지 않고, 가만히 로마노가 가는 방향을 응시할 뿐이다.
다음날 아침, 예담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평소 나가는 시간에 학교로 가던 길이다. 그런데, 곧장 누군가가 예담의 옆에 따라붙기 시작한다. 예담은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짓지만, 그 사람은 예담의 옆에서 멈추지 않는다.
“아니, 누구...”
예담은 돌아보자마자, 안도한다. 그건 다름 아닌 리암이다.
“아니, 또 만나네요. 혹시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건가요?”
“그건 아니고, 누군가를 쫓고 있는데 말이야...”
“네? 쫓다니요? 누구 그럴 만한 사람이 보인다고?”
그런데 다음 순간 또 보니, 리암은 어느새 이상한 고글을 쓰고 무언가를 열심히 눈으로 쫓고 있다. 예담은 얼른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리암의 행동거지로 보아서는 거짓말이라든가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리암이 쫓는 사람의 흔적인 보인 듯하다.
“어... 라티카... 그래. 여기서 멈췄네.”
“혹시 아는 사람인가요?”
“아, 그래. 라티카라는 여자인데, 나하고 같은 학교를 나왔어.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학교에 안 나왔는데, 어제 보니까 무슨 불량배들을 데리고 돌아다니고 있더라.”
“그 설마 TV에서나 보던 거요?”
“맞아! 얼핏 보니까, 별 이상한 말을 다 하더라. 뭐, 자해공갈은 기본에, 초능력을 이용한 사기까지, 딱 내가 생각한 그대로지.”
그렇게 말하다가, 리암이 별안간 그 자리에 멈춘다.
“아니, 형, 왜요?”
그리고 그 시간, 민 역시 막 집에서 나와서 학교로 가던 길이다. 어제 예담을 비롯한 다른 친구들과 아는 사람들에게 마스크 사진까지 첨부해서 메시지를 보내 봤지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어제 말한 대로 교문에 있나 볼까...”
하지만 교문에 걸린 마스크는 눈을 씻어봐도 찾기 어럽다.
“에이, 뭐야? 건다면서?”
그런데 바로 그때, 지아의 인형 중 하나가 민의 뒤쪽에서 뛰어오는 게 보인다.
“뭐야, 내가 오니까 달려오는 건 또 뭔데...”
교문으로 재빨리 뛰어오르더니, 어제 민이 말한 그 마스크를 건다. 물론 인형이 더 높게 뛸 수 있게, 민이 염동력을 조금 사용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에이, 이제 됐네.”
이제 기다릴 건 그 마스크를 보는 학생들의 반응이다. 민의 의도대로, 동급생들과 선배들 몇 명이 교문 기둥에 걸린 마스크를 보더니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우와, 저거 누구 마스크래?”
“몰라. 저렇게 일부러 걸어놓은 건 이유가 있을 텐데, 저것도 혹시 스트리머들 이벤트 같은 게 아닐까?”
“스트리머들이 저걸 걸었다고? 야, 말이 되는 소리냐, 그게?”
“콜록, 콜록...”
그 시간, 미린초등학교에서 실습중인 교생 로드리고는 막 출근하는 중이다. 옆에는 아마데오와 미겔도 같이 가고 있다. 로드리고와 아마데오는 어제처럼 입에 마스크를 하고 있다. 둘 다 콜록거리는 소리를 입에서 연신 내고 있는데, 마스크를 안 쓴 미겔은 사탕을 빨고 있다. 미겔 역시도, 치열교정기를 낀 게 살짝씩 드러나 보인다. 로드리고는 불평스럽게 말한다.
“에이-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이런 거 없었는데. 무슨 초능력자 하나 나온다고 이렇게 난리를 떠는 게 어디 있어?”
로드리고의 그 말에 아마데오가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에이, 형이 다른 데 있다가 와서 그래. 요즘 우리 학교에 초능력자들이 얼마나 날뛰는데.”
“언제부터 이랬냐?”
“몇 달 됐지. 어떤 녀석이 이상한 짓을 잔뜩 해 놓은 탓에...”
“콜록... 나는 TV나 만화의 등장인물이 아니야. 나는 교사가 되기 위한 과정에 있을 뿐이라고. 별로, 이런 이상한 놀이에는 끼고 싶지 않은데...”
로드리고는 불쾌하다는 반응이다. 아마데오가 맞장구를 치면서 말한다.
“에이, 형 왜 그러는지 다 이해한다니까. 그런데 말이야, 학교가 무슨 만화나 영화 같은 데 나오는 그런 사람 못 올 데는 아니라니까?”
아마데오가 그렇게 말하자, 로드리고는 미겔을 돌아본다.
“미겔, 진짜냐?”
“맞아... 맞다니까는!”
미겔까지 고개를 끄덕이자, 로드리고는 ‘휴’ 하며 한숨을 쉬고는, 계속 걷는다. 콜록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