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알려진 전말은 대략 이러합니다.
사업가 예브게니 프리고진(Евгений Пригожин, 1961년생)이 설립한 민간군사기업인 바그너그룹이 우크라이나의 전장을 빠져나와 러시아 남부의 대도시인 로스토프, 정확히는 로스토프나도누(Ростов-на-Дону)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로스토프나도누는 인구 100만명을 넘는 러시아 남부의 대도시로 로스토프 연방주(Ростовская область)로 유럽에서 5번째로 긴 강인 1,870km의 돈(Дон) 강 유역에 위치합니다. 로스토프나도누라는 지명 또한 돈 강변의 로스토프라는 뜻. 이 도시는 러시아 남부의 문화거점로 군림하는 인구순위 러시아 11위의 대도시일뿐만 아니라 2018년에는 러시아 월드컵의 경기도 개최된 적이 있는 중요한 도시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바그너그룹이 러시아에 반기를 들게 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로스토프는 명실상부한 군사도시이기도 하기에 만일 이 도시가 바그너그룹의 수중에 함락되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쟁은 당장 내일을 장담하기 어려워질 정도로 혼란스러워집니다. 로스토프는 러시아군의 남부군관구(Южный военный округ) 본부가 소재한 도시로, 여기를 상실하게 되면 러시아 국토의 최남단의 군사력 유지는 불가능하고 카스피해 연안을 장악할 수도 없게 되어 러시아의 군사전략의 근간이 흔들릴 수밖에 없게 됨은 물론 러시아군 보급의 주축이기도 하기에 로스토프의 손실은 즉 우크라이나를 침략중인 러시아군을 고립무원의 상태로 만든다는 의미로도 통하게 됩니다.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은 러시아도 바그너그룹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바그너그룹이 러시아의 아픈 곳을 일부러 찔러대는 것입니다.
이 지도에서 로스토프가 왜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How Russia’s Military Is Currently Positioned (2022년 1월 7일 The New York Times, 영어)
로스토프는 지도의 오른쪽인 동부지역에 Rostov-on-Don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돈바스 지역이라고 불리는 루한스크와 도네츠크에서 별로 멀지 않아서 그 지역에서 러시아군과 같이 전투중인 바그너그룹이 언제든지 방향을 돌려서 치기에는 매우 가깝습니다.
또한 지도에는 붉은 원, A, V 및 T가 표시되어 있고 붉은 사각형도 있습니다. 붉은 원은 병력의 규모로 로스토프에는 대략 5,000명 정도가 있고 크림반도에는 10,000명, 또한 돈바스 지역에는 수만명이 집결해 있습니다. A는 포병부대(Artillery), V는 장갑차부대(Armored Vehicles), T는 전차부대(Tanks)를 가리키고 붉은 사각형은 기타 군사거점을 뜻합니다.
프리고진의 주장으로는 바그너그룹이 로스토프로 진입하는 데에 일절 저항을 겪지 않았다고 합니다. 단지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누구라도 쳐부술 것이고 끝까지 전진할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게 어디부터 어디까지 얼마나 사실인지는 알 길이 없다 보니 아직은 관망해야겠지만 로스토프의 주둔병력 규모가 개전 이전에 5,000명 정도인데 그 병력이 온존해 있다는 보장도 없고 바그너그룹 또한 피해를 많이 입었다고는 하지만 일단 25,000명 규모는 여전히 유지하는 것으로 보이는만큼 작정하고 로스토프로 진격한다면 로스토프는 그냥 맥없이 함락되는 이외에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바그너그룹이 시리아나 중앙아프리카 등의 세계 각지의 분쟁지역에서 온갖 전투경험을 쌓았다 보니 훈련수준이 낮은 러시아의 정규군에 일방적으로 밀린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바그너그룹의 전쟁지속력.
바그너그룹이 로스토프를 장악하면 확실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지속력은 박살나 버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장악한다고 하더라도 바그너그룹의 전쟁지속력에는 의문이 있습니다. 전쟁은 매일 천금을 소모하는 다량의 소비행위이기도 하고, 그 형편없는 러시아의 보급능력조차도 바그너그룹이 능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러시아에서 물자를 지급받는 그 용병집단이 제대로 보급능력을 확보하기도 힘든데 로스토프를 장악한다고 한들 그게 얼마나 오래 갈지도 의문입니다.
또한,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우크라이나보다는 바그너그룹에 쓸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아질 것이라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러시아가 타국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핵무기를 쓴다면 모스크바가 갑자기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국의 영토에 투하한다면 그럴 위험은 없어집니다. 2002년의 모스크바 극장 인질사건에서는 펜타닐 가스를 써서 인질범과 인질들을 대량으로 죽였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끌어온 체첸전쟁에서는 쓰지 못했던 것을 자국 내에서는 잘만 썼는데, 로스토프를 잃을지언정 적에게 도움이 되게끔 순순히 넘겨줄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이 정도입니다.
2000년도 더 전에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것처럼 프리고진 및 그의 바그너그룹이 돈 강을 건넜다는 것.
하지만 러시아에는 독재자나 반란수괴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러시아를 더 사랑했다고 말할 사람이 없는 것.
그리고, 의롭지 못한 목적으로 합치면 이렇게 언제나 아주 추잡한 꼴로 갈라서게 되는 것.
이제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은 러시아에게 더욱 불리해집니다.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용병집단이 바그너그룹인 이유는 독일의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의 음악을 좋아해서라는데, 그런 의미에서 4부작 악극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 시리즈의 마지막 악극인 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의 결말 부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956년 바이로이트 바그너축제 당시의 음원으로 독일의 지휘자 한스 크나퍼츠부쉬(Knappertsbusch, 1888-1965)가 지휘했습니다.
브륀힐데(Br?nnhilde)가 "고향으로 날아가라 까마귀들아(Fliegt Heim, Ihr Raben)" 를 노래하며 이미 숨을 거둔 영웅 지크프리트(Siegfried)에의 마지막 찬사를 남긴 후 다시 말을 타고 화염 속으로 뛰어들어 지크프리트의 뒤를 따르는데, 정작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한다는 프리고진은 그렇게까지 올곧은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화염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은 똑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