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혼술" 과 "주린이" 라는 어휘에서 느껴진 빈곤

SiteOwner 2021.03.23 00:00:19
신조어가 넘치는 시대에 신조어에서 빈곤을 느끼는 게 꽤나 역설적입니다만, 최소한 저는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당장 생각나는 것은 제목에서 언급한 "혼술", 그리고 "주린이" 입니다.

혼술이란 혼자서 술을 마신다는 말인데, 사실 고전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식자층이라면 이에 해당되는 어휘가 있다는 건 알 수 있습니다. 굳이 혼술이라는 용어를 안 만들더라도, 독작(独酌)이라는 말이 있다 보니, 혼술이라는 약어가 있어야 할지 자체에 의문이 남습니다. 사실 압축의 효용도 그다지 좋지는 않습니다. "혼자 술" 을 줄여서 "혼술" 이라고 겨우 1글자를 줄여서 그게 언어의 경제성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삐딱한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러다가는 혼자 술을 마시는 행위에 대해 "드얼" 이나 "알트" 라는 신조어가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어의 Drinking alone 발음인 "드링킹 얼론" 을 줄여서 "드얼", 독일어의 allein trinken 발음인 "알라인 트링켄" 을 줄여서 "알트" 라고 하더라도 이게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어차피 혼술이든 드얼이든 알트든 모두 약어이고, 기존의 어휘는 생각지도 않은 것인데 본질적으로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번에는 주린이.
요즘 주식투자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장기간에 걸쳐 해 본 사람도 있는 반면, 이제 막 주식투자에 입문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회풍조에서 태어난 말은 "주식" 과 "어린이" 의 합성어인 "주린이" 로 통용됩니다.
그런데 이 말에서 저는 빈곤을 느끼고 있습니다. 주린이라는 어휘가 "굶주린 사람" 으로 읽히기도 해서 그렇습니다.
국어에 실제로 "주리다" 라는 동사가 있습니다. 요즘 들어서는 "굶주리다" 로 잘 쓰이지만, 한 세대 전의 각종 출판물을 읽어 보더라도 "주린 배를 움켜쥐고" 등의 표현이 꽤 나오다 보니, "주린이" 라는 단어가 "주식+어린이" 가 아니라 "주린+이", 즉 굶주린 사람으로 읽힐 수도 있다 보니 이 어휘가 그다지 반갑지 않습니다. 그냥 "주식초보" 내지는 "주식초짜" 정도면 모를까...
주식투자를 잘못하면 써 보지도 못한 돈을 잃는 사태가 나고, 그러면 정말 주린 배를 움켜쥐고 버텨야 할 수도 있습니다. 신조어가 별개의 기존어휘, 그것도 부정적인 어휘와 비슷한 것으로 읽히는 것이 반가울 리가 없는데, 왜 문제의식조차 없는지 모를 일입니다.

지난 11월에 썼던 글인 광고에 등장한 끔찍한 약어에서 지적했던 문제가 여전합니다.
찾아가는 서비스의 이름이 STAB이고, 독작이라는 용어는 아예 배운 기억이 없는 것 같고, 돈을 벌려고 주식투자하는데 그 전선에 막 뛰어든 사람들의 약칭이 굶주린 사람처럼 읽히는 것은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언어환경하에서 이렇게 문제의식을 갖는 게 무의미하게 되는 건 아닌지, 그것도 두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