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물의 명칭은 사물 그 자체를 가리킨다고 여겨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그렇게 일반화하기에는 곤란한 어휘가 몇 가지 있습니다.
당장 생각나는 몇 가지를 떠올려 보니까,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형성의 과정이 주가 된 말이 의외로 있습니다.
일본어의 니보시(煮干し), 터키어의 케밥(Kebab)이 대표적으로 그렇습니다.
니보시는 한자를 보면 뜻이 바로 나옵니다. 쪄서 말린 것. 하지만 이 어휘는 대체로 그렇게 가공된 건멸치를 말합니다. 멸치는 온데간데 없고 가공방법만 남아서 어휘를 구성합니다. 또한 케밥은 원래 구이를 말하는 것이고, 무엇을 어떻게 구웠는가에 따라 구체적으로 달라집니다. 식재료에 따라서는 양고기 케밥, 치킨케밥 같은, 요리의 양식에 따라서는 되너케밥, 쉬쉬케밥, 이스켄데르케밥 등의 다양한 것이 나옵니다. 이러한 사례는 분명 세간의 상식과 배치됩니다.
그나마 위의 경우는 그나마 괜찮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인민공화국, 민주공화국 등의 국호를 지닌 국가에서 정말 인민이나 민주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경우도 있습니다. 스스로 대국을 자처하지만 국민성이 소국이라서 평균을 낸 결과가 된 중국이라든지, 김일성 일가의 인물이라도 집권자가 아니면 누구든지 비명횡사할 수 있는 북한, 풀네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든지, 유럽 전체의 면적과 맞먹고 천연자원도 풍부하지만 군벌의 난립 및 인권침해가 일상화된 분쟁광물의 본산인 콩고민주공화국 등. 이런 경우는 참 씁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