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드라마 체르노빌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을 뽑자면 2화의 후반부, 최고위원회 회의 장면이었네요.
체르노빌에서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에 발의된 최고위원회 회의는 발전소 측의 "별것 아닌 일"이라는 거짓 보고에 수긍하고 회의를 마치려 하자, 레가소프는 다급하게 "원자로가 폭발했다"고 소리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을 간청합니다. 그러자 서기장 고르바초프는?"진실이 어쩐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정식 보고 체계에 따라 올라온 보고서를 발표하는 당간부를 부정하는 것만 들린다"면서 레가소프를 권위로 눌러버리죠.
여기까지는 그냥 재난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권위로 묵살하는 높으신 분의 클리셰 대로.
상황이 하도 다급한데다가 레가소프 입장에서는 한시가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이를 모르는 사람들에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잘 모르는 용어로 뭐라뭐라 떠들어댈뿐인 상황이기에 고르바초프는 이러한 무례함(하물며 배경은 80년대의 소련)을 지적한?것이죠.?고르바초프의 지적에 레가소프도 자신의 무례를?사과하면서 자신에게 기회를 준다면 예의를 차려서 처음부터 설명을 해드리겠다고 발언권을 부탁합니다.
그러자 고르바초프는 놀랍게도 최고위원회 사람들을 물려 도로 자리에 앉히고, 일단 전문가인듯한 레가소프에게 지금의 상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죠. 레가소프는 탄환을 예시로 들어 원자로 폭발의 위험성을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하고, 레가소프의 설명이 처음 별 일 아니라고 보고한 발전소 측의 보고와 상충하는 상황에서?더 자세한?사태 파악을 위해 전문가인 레가소프와 당 간부인 셰르비나를 현장에 급파해서 정보가 들어오는대로 자신에게 보고하도록 명령합니다.
처음에는 레가소프를 믿지 못해 무시하고 반발하던 셰르비나도 고르바초프가 원자로를 잘 아느냐고 묻자 모른다고 대답했다가 "그럼 장관이 보는 것이 뭔지 어떻게 알겠소?"라는 대답을 듣자 별 수 없이 수긍하고는?레가소프와의 불편한 동행을 시작하게 되죠.
드라마에서는 고르바초프 본인도 KGB의 눈치를 보는듯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아랫 사람의 간청에 발언권을 허락하면서 전문가로 보이는 듯한 레가소프의?의견을 일단 들어는 보고, 더 자세한 상황 판독을 위해 이들을 현장에 파견하는 등. 지금까지 흔하게 봐온 '자신이 가진 권위로 아랫사람을 묵살하는 높으신 분'과는 정 반대되는 캐릭터라 굉장히 신선했네요. 게다가 레가소프와 셰르비나가 체르노빌에 파견된 이후에도 이들의 요청에 안된다거나 못해주겠다는 말은 없고, 자신의 권력으로 가능한?한도 내에서?최대한으로 지원해주죠.
허나 이러한 고르바초프도 결국에는 소련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부품.?독일에서 2000 뢴트겐을 버틸 수 있는 로봇을 수입하도록 손을?쓰지만?2화에서 밝혀지는 사고 당시 원자로 노심의 방출량은 시간당 약 1만 5천 뢴트겐. 노심에서 뿜어져나오는 연기마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두배에 상당하는 방사성 물질을?방출하고 있다"는 레가소프의 언급을 생각해보면 애초에 소련은 이 상황에서도 프로파간다를 위해 노심에 갖다두면?삼십분도 못버티고 고철이 될?쇳덩어리?따위를 한낯 자존심을 위해 생색내기로 사온 것에 불과하다는 어두운 진실이 감추어져 있었죠.
특히 처음엔 고르바초프가 직접 호명해서 현장에 파견한?장관회의 부의장이자 연료동력부 장관인 셰르비나 조차도 독일의 로봇이 방사능에 고장났다는 소식을 듣고 뭔가 직감하여 전화를 돌리다가?국가의 이러한 추악한 프로파간다를 알게되자 진심으로?격분. 고르바초프와 고위 간부들에게 쌍욕을 퍼부으며 전화기를 박살내버리고 현장에서 지내며 정이 든 레가소프에게 "전화기가 새로 한 대 필요하겠군"이라고?싸늘하게 농담 한마디 건내는?모습이 백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