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일본의 드라마 집단좌천(集団左遷!)을 보고 생각난 게 하나 있었습니다.
그 집단좌천에는, 작중 배경인 미츠토모은행 카마타지점이 활발하게 가두 프로모션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의 취재를 위해 주간지 발행사의 기자가 방문하기도 하고, 또한 "일하는 미녀" 라는 화보 또한 포함되다 보니 여직원들이 미모를 뽐내며 사진작가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것도 나왔습니다. 모두 멋지게 소개될 직장을, 그리고 아름답게 소개될 여직원들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주의 주간지에 나온 기사는, "폐점위기에 내몰린 미츠토모은행 카마타지점" 제하로 쓰여지고, 직원들이 집단좌천된 신세라고 악의적으로 서술되는가 하면 가두 프로모션 장면 또한 지역은행지점의 파산을 막아달라는 읍소로 보이게끔 주석이 달려 있었습니다. 은행 사람들은 모두 분노했고 지점장이 전화를 했지만 기자는 "내용이 바뀐 건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라고 면피성 발언만 되풀이할 뿐...
이런 식으로 왜곡하는 것을 악마의 편집이라고 하지요.
요즘 온갖 분야에서 취사선택과 왜곡이 날뛰는데, 그것을 처음 느낀 것은 어릴 때 읽었던 소설의 한 대목.
영국의 소설가 아서 C. 클라크(Arthur C. Clarke, 1917-2008)의 1957년작 소설 바다순찰대(The Deep Range)에는 주요 등장인물로서 돈(Don)과 월터(Walter)가 나옵니다. 잠수정을 타고 바다 속의 고래를 관리하는 베테랑 순찰대원 돈과 아직 여러가지가 서투른 월터의 활동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돈은 도중에 해저지진에 조난을 당해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월터는 충격에 빠지고,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생각에 순찰근무도 내팽겨치고 말아 폐인이 되고 말아 버립니다. 이 대목에서 당시에 읽었던 소설의 문구는 이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돈을 빼앗아 간 것이었다."
그냥 이 문장만 보면, 작중의 인물이 얼마나 구두쇠이길래 돈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길래 저렇까지 된 건지, 돈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텐데 하는 오해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장의 "돈" 은 앞에서 말했듯이 인명인 Don이지 금전을 뜻하는 게 아니니까 맥락을 모르고 저것만 보고 판단하면 결론은 반드시 잘못되는 방향으로 나오게 됩니다.
다시 처음의 집단좌천 이야기로.
문제의 주간지 기사가 나오자, 해당 지점을 구조조정 대상으로 찍어놓은 본부의 요코야마 상무는 이 기사에 아주 만족해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역효과를 내고 말았습니다. 은행이 위치한 지역주민들이 지역은행을 살리자고 의기투합해서 도리어 실적이 대거 높아지게 되고, 6개월 안에 100억엔의 실적을 내면 폐점안을 철회하겠다고 말했던 요코야마 상무는 오히려 자신의 말의 무게에 자신이 눌리는 중압감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악마의 편집이 훌륭하게 카운터펀치를 먹이는 경우도 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악마의 편집은 많은 경우 수정되지 않거나 설령 수정되더라도 당사자들이 이미 큰 피해를 받거나 세상에 없는 뒤인 경우가 많습니다. 1993년 3월 26일, 남아프리카의 사진작가 케빈 카터(Kevin Carter, 1960-1994)가 촬영한 굶주린 한 아이와 그 뒤에 선 대머리독수리를 촬영한 사진이 뉴욕타임즈에 실렸고, 이 사진이 큰 반향을 일으켜 그가 1994년 4월에 퓰리처상을 수상하지만, 사진에 대한 비난이 계속되자 결국 3개월 후인 7월 24일에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뜬 지 올해로 4반세기를 맞습니다만 악마의 편집 논란은 현실이든 창작물이든 가리지를 않고 계속됩니다.
악마의 편집이라는 게 의외로 가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게 30여년 전에 읽은 소설에서 처음 인식된 이래 어제 본 드라마를 통해 다시금 생각나고 대학 교양수업 때 들었던 사례마저 같이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