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철도의 날입니다.
유래는 경인선 개통일인 1899년 9월 18일인데, 딱히 이걸 기념할 의사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다루어 보고 싶은 사안이 하나 있습니다. 해외철도문물 등을 언급할 때, 특히 TGV, ICE 등의 표기에 있을법한 의문.
TGV는 프랑스의 고속철도를 말하는 것으로, 프랑스어 Train à grande vitesse의 약자입니다. 의미는 고속열차.
ICE는 독일의 고속철도를 말하는 것으로, 영어 Intercity-Express의 약자입니다. 의미는 도시간 특급.
이것들을 프랑스의 것이니 TGV를 티지브이로 읽으면 안되니 떼제베로 읽어야 한다느니, ICE가 독일의 것이니 아이씨이로 읽으면 안되니 이체로 읽어야 한다느니 하는 것을 보면 참 가소롭기 짝이 없습니다. 영어식으로 읽든지 말든지 그것은 그 어휘를 수용하는 국가의 국내언어환경을 따르면 되는 것이고, 프랑스어 표현은 프랑스어를 쓸 때 쓰면 되는 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독일 고속철도의 약칭 ICE는 애초에 독일어 약어도 아니고 영어 약어인데 뭘 독일어 타령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칸센(新幹線)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칸센이 세계 최초의 상업운전을 시작한 고속철도의 타이틀을 지니고 있다 보니 사실상 일반명사화되어 있는데, 이것을 반드시 신칸센으로만 읽어야 한다는 법칙은 없습니다.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어서 신간선이라고 해도 되는 일이고, 원래 신칸센 계획이 탄환열차계획의 연장선이다 보니 영어권에서는 Shinkansen 이외에도 Bullet Train이라고도 쓰니까 그렇게 쓰면 됩니다. 즉 신칸센이 일본의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신칸센이라고만 써야 한다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한번 이것을 볼까요?
신칸센 규격이 아닌 기존의 철도를 재래선(在来線)이라고 하며, 일본어 발음은 자이라이센. 그런데 일본의 그 재래선을 일본의 문물이라고 자이라이센으로 읽어야 옳다는 주장은, 과문의 탓인지는 몰라도 여태 본 적이 없습니다.
TGV를 프랑스어로, ICE를 독일어로 읽어야만 한다는 주장이 그래도 옳다면, 저는 반례를 3개 더 제시하고 싶습니다.
스위스연방철도는 스위스의 주요 공용어가 독일어, 프랑스어 및 이탈리아어인 이유로 약어가 3개입니다.
스위스연방철도에서는 차량 측면에 로고 및 각 언어 약어를 표기하는데 SBB CFF FFS입니다. 각각 독일어 Schweizerische Bundesbahnen, 프랑스어 Chemins de fer fédéraux suisses, 이탈리아어 Ferrovie federali svizzere. 이것을 각각 독일어, 프랑스어 및 이탈리아어 알파벳 독음을 배워서 읽어야 할까요? 어차피 한국인은 스위스연방철도라고 표기하면 되고 제1외국어로서 영어를 채택한 이상 Swiss Federal Railways라고 해도 무방하며, 스위스 현지에서 통용되는 표현을 표시하고 싶으면 SBB CFF FFS로 쓰면 그만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미 결론은 났습니다.
그래도 아직 불충분하다면 이것이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연방철도는 독일어 풀네임이 Österreichische Bundesbahnen, 약칭 ÖBB입니다. 그러면 이걸 독일어 알파벳으로 외베베라고 읽을까요? ICE가 독일의 고속철도니까 이체로 읽어야 한다면 이 경우에도 당연히 외베베로 읽어야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무슨 득이 있을까요. 외베베 하는 소리가 어버버 하는 것으로 오해되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입니다. 게다가, ICE는 분명 알파벳 3개인데 정 발음을 옮기면 이체에에 가까운데.
러시아 국유철도까지 보자면 더욱 가관일 것입니다.
러시아 국유철도의 러시아어 표기는 Российские железные дороги로 약칭 РЖД. 약칭을 러시아어 알파벳 독음으로 읽으면 에르줴데가 되는데 누가 이렇게 표기하는지는 아직은 못 봤습니다.
주장은 자유이지만 그 주장의 근거는 언어생활의 원리와 현실에 맞게 일관적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