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주제는 랜덤 인카운터(Random Encounter / Random Event)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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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TRPG(테이블 RPG)와 JRPG(일본식 RPG)에서 확률에 따라 몬스터와의 전투로 전환되는 것입니다만, 시대가 흐르고 흘러 게임이 발전하자 몬스터와의 전투는 이제 흔하다 못해 일상이 되어버렸죠. 그래서 근래의 게임에서는 오픈월드나 샌드박스 형식과 맞물려 '예기치 않게 받아들이게 되는 퀘스트'로 바뀌고 있습니다. 맵에 표시되지 않다가 가까이 가야만 출현한다든지, 맵에 적당히 표시는 되지만 출현 조건이 정해져 있다는 식으로 원판의 랜덤 즉 무작위성을 살리기도 합니다.
위의 예시를 들자면 GTA를 필두로 한 샌드박스 게임이 대표적입니다. 자유롭게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특성상 길을 가다가 싸움이 벌어지는 건 다반사고, 싸움과 전혀 거리가 먼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슬리핑 독스의 우호도 미션(Face Mission)이나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여러 부가작업들처럼 테마는 영락없는 랜덤 인카운터임에도 위치와 조건이 명확하여 무작위가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당연히 본연의 의미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는데 포켓몬스터 시리즈가 대표적이고(다만 이 쪽은 풀숲이 움직이는 묘사를 통해 힌트를 추가하고 있다더군요), 조금 되긴 했지만 용과 같이 시리즈처럼 주인공의 외모가 어떻든 미칠듯이 시비를 걸어 전투가 벌어지는 게임도 있습니다. 다만 전자는 풀숲이 움직이는 묘사를 통해 힌트를 주고, 후자 역시 적들이 무작정 달려드는 게 아니라 근처에서 오랫동안 머무르면 '뭘 쳐다봐?'라며 시비를 거는 이유가 생기도록 바뀌었습니다. 개연성 문제도 있겠지만, 역시 초보자를 위한 배려가 아닐까 싶습니다. 빈사지경의 상태에서 체력을 채우거나 저장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데, 뜬금없이 전투가 벌어져 사망한다면 게임 삭제하기 좋은 타이밍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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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이 랜덤 인카운터야말로 게임(더 나아가서는 창작물 전반)과 현실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창작물에서는 세계관이나 극의 흐름상 반드시 일어나야 하거나 그럴 확률이 매우 높은 사건을 제외하면, 대부분 주인공과 하등 상관없는 사건이 엄청나게 벌어지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죠. 비현실적인 것을 떠나 현대 배경을 삼은 샌드박스 게임을 예시로 들어도, 길을 가던 사람이 도움을 청한다거나 자신의 일을 도와달라고 말하는 일이 없습니다. 게임과 달리 현실만의 문제-인간관계, 신변의 안전 등-가 있기 때문이죠. 반면 창작물에 집중할 경우, 작품 외적으로 보면 여백을 메우기 위한 창작자의 고민일 경우가 많고요. (만화가로서는 시간벌이 내지 잔재미, 게임 제작자로서는 용량 늘리기 내지 잔재미) 잔재미란 공통점이 있고.
이상하게도 저는 창작물의 본편 스토리도 재미있게 보는 편(물론 막장 전개는 무시합니다)이지만, 그것보다는 이 랜덤 인카운터를 포함한 짜투리 에피소드를 더더욱 좋아합니다. 내용이 짧고 기승전결이 확실해서 이해하기 쉽고, 바로 다음 행동을 결정할 수 있으니까요. 의도적으로 뒷내용에 대해 떡밥을 내포할 필요성도 없고요. 오히려 이러한 짜투리 에피소드에서 생각치도 못한 떡밥을 찾아내 부풀려서 나중에 써먹는 경우가 더 많다더군요. 이런 의외성도 들어가 있기 때문인지 만화를 읽거나 게임을 하다보면 묘한 기대를 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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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만화나 애니, 게임에서 이렇게 정말 우연히(random) 접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혹은 (범죄 등 불법적인 사건을 제외하고) 이런 일이 일어나봤으면 재미있겠다, 혹은 일어나면 정말 곤란하겠다 싶은 사건이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