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산 창작물을 즐기는 방법은 여러 경로가 있지만, 보통 국내에서는 번역된 것을 받아들이기 마련이죠. 그 방법은 자막도 있고 더빙도 있고, 간혹 해외에서 만들어졌지만 오리지널 내용 그대로 더빙되는 게 아닌 완전 국내번안되는 방식도 있어요. 이렇게 번역되는 과정에서, 놀라운 센스가 발휘되어서 볼수록 감탄스럽게 여겨지는 것도 있어요. 그런 사례를 흔히 초월번역이라고 하죠. 여기서는 초월번역의 사례를 모아 보기로 해요.
먼저, 등장인물, 단체, 어구 등에 대한 초월번역부터.
달이 아름답군요
일본의 소설가이자 1984년에서 2007년까지 1000엔 지폐도안의 인물로도 채택되어 유명한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가 영어교사 시절 때 영어문장 I love you를 직접적으로 번역하는 건 일본인이 바로 입에 담기에는 뭐하니까 달이 아름답군요(月が綺麗ですね)라는 문장 정도로 둘러서 말하더라도 마음이 전해진다고 했다고 전해지는 어구.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해져 오는 이야기라서 확실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이 번역의 파급력은 꽤 넓은 편이라서 일본 내에서는 초월번역으로 여겨지고 있어요. 어서오세요 실력지상주의 교실에, 여동생만 있으면 돼 등의 애니에 예의 문장이 등장하거나, 제목으로 활용한 애니 달이 예쁘다(月がきれい)도 있을 정도.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
1942년에 개봉된 미국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릭 블레인 역의 배우 험프리 보가트(Humphrey Bogart, 1899-1957)가 말한 대사인 "Here's looking at you, kid." 가 일본에서는 "君の瞳に乾杯(키미노 히토미니 칸파이)" 로 번역되어서 명대사가 되었어요.
암흑패 (요리왕 비룡)
작중의 악의 조직으로서 정통요리계와 대립하는 이 암흑패의 원제는 裏料理界(우라료리카이), 직역하면 뒷요리계. 하지만 이 번역은 별로 와닿지 않아요. 뒷골목, 뒷세계 등의 단어를 통하여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직관적이지는 않다는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요. 하지만 암흑패의 목적이 요리로 인간을 지배하는 데에 있고,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온갖 야비하고 음험한 수단도 가리지 않으며 활동상 등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일단 드러나면 아주 폭력적인 것에서 어둡고 검은 패거리를 뜻하는 암흑패로 명명된 것은 다른 대체수단이 없을 정도의 훌륭한 초월번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꼬마짱 (논논비요리)
논논비요리의 등장인물 중 코시가야 코마리는 중학교 2학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단신으로 여동생 나츠미가 코마쨩이라고 부르는 것을 자신이 작다는 이유로 부른다고 여겨서 싫어하고 있어요(코마이는 작다는 뜻). 그런데 이 애니가 애니플러스에서 방영되면서, 그 코마쨩이 "꼬마짱" 으로 옮겨졌고, 더 이상의 설명 자체가 불필요한 훌륭한 초월번역이 되었어요. 글자 그대로 꼬마같다고 꼬마짱. 작중에서 여러모로 굴욕을 당하는데, 해수욕장에서 미아 취급을 당해서 실제의 키(140cm 미만)마저 공개적으로 폭로된 데에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낭자애
일본어 男の娘(오토코노코)의 번역으로서 애니플러스에서 사용된 이래 대거 보급된 용어.
낭자가 젊은 여성을 가리키는 옛말인데다 남자와 발음이 비슷한 것이, 여성스러운 남자아이를 가리키는 男の娘의 속성을 나타내는 데에 적격이다 보니 다른 표현보다도 더욱 널리 퍼질 수 있었어요.
잉여신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
이 멋진 세계의 축복을, 또는 일본어 원제의 발음을 줄인 코노스바의 캐릭터인 아쿠아는 이름보다 잉여신이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어요. 일단 아쿠아가 여신이긴 한데 시원찮은 점이 부각되다 보니 원판의 별명은 다메가미, 즉 다메(글러먹은)+메가미(여신)의 합성어가 되어 있어요. 잉여신은 이것을 잉여+여신의 합성어로 번역해 낸 것으로, 원판의 별명의 어감과 의미를 모두 다 살린 훌륭한 초월번역이죠. 저는 코노스바를 보다가 도중하차해서 자세한 이야기는 잘 모르지만, 잉여신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어둠의 학생회 (감옥학원)
위의 요리왕 비룡의 암흑패와 비슷한 경우로, 감옥학원의 배경 하치미츠 학원 내의 대립하는 두 학생회 중 뒷세계 학생회(裏生徒会, 우라세이토카이)는 이렇게 번역되고 있어요. 원래에는 정식 학생회가 있지만 실질적으로 학생사회 내부를 장악한 이 어둠의 학생회는 아예 정식 학생회를 실각시키고 표면적으로 나오면서, 여학교에서 공학으로 전환후 처음으로 입학한 5명의 남학생이 여자목욕탕 훔쳐보기를 시도한 사건을 일으키자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게 되어요.
제목 자체가 초월번역인 경우 또한 존재하고 있어요.
마탄의 사수
독일의 작곡가 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 1786-1826)의 1821년작 오페라 Der Freischütz를 일본어로 번역한 魔弾の射手를 재번역한 것이 바로 마탄의 사수. 보통 이 번역이 일본식 번역제목의 중역제목으로 원어 그대로를 번역해서 자유의 사수(Frei는 자유, Freischütz는 사수)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근거에 의한 주장이예요. 제목에도 나오는 프라이쉬츠(Freischütz)는 독일의 민담에 나오는 그가 잡고 싶어하는 사냥감을 무조건 적중시키는 총알을 위해 악마와 계약한 포수를 말해요. 즉 자유로운 것은 포수 자신이 아니라는 의미. 그래서 마탄의 사수라는 번역이 타당하고 잘 된 번역.
춘희
이탈리아의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의 1853년작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가 일본에서 椿姫(츠바키히메)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이래, 우리나라에도 이 오페라의 제목은 일본식 번안제목을 한국식 한자발음으로 읽은 것이 통용되어 있어요. 원제의 의미는 타락한 여자라는 의미로, 과거 국내 언론에서도 잘 썼던 어휘인 윤락녀와 통하고, 주요 등장인물인 비올레타 또한 명색이 사교계의 여왕으로 포장되어 있을 뿐 실상은 그러해요. 이 작품이 일본에 소개되었을 때는, 비올레타가 동백꽃 장식을 하고 있는 것에서 유래해여 번역명이 츠바키히메가 되었고, 이 번역이 우리나라에도 한동안 그대로 정착했어요. 요즘은 원제 그대로 라 트라비아타라고 쓰기는 한데 완전 직역은 아직 본 적이 없어요.
요리왕 비룡
원제는 中華一番(츄카이치반)이지만, 이것의 한자를 그대로 읽어 중화일번이라고 해봤자 딱히 와닿지는 않죠. 하지만 작중에 용이 잘 등장하고, 애니판에서는 그 용이 날거나 작중 생존자로서는 요리 최강자인 주인공이 그 용을 타고 나는 모습도 구현되다 보니 요리왕 비룡이라는 완전히 새로이 만들어 붙인 제목 자체가 내용을 잘 요약하여 보여주고 있어요.
고독한 미식가
원제는 孤独のグルメ(코도쿠노 구루메)이고, 이것을 직역하면 "고독의 미식" 이 되어요. 그러나 이 직역은 내용에서는 충실하지만 실질적인 어감이나 공감도 면에서는 확실히 부족한 면이 있어요. 이것을,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로(마츠시게 유타카 담당)의 극중 식사를 중심으로 해석하여 보다 한국어답게 다듬은 결과가 고독한 미식가. 간단하게 만들었으면서도 잘 된 번역명이죠. 참고로 독일어판 제목은 Der Gourmet - Von der Kunst allein zu genießen으로, 예술적으로 혼자 즐기는 미식가라는 의미인데, 이건 일단 너무 길다 보니, 간단명료하면서도 함의가 잘 드러나는 한국어판 제목과 여러모로 대조되고 있어요.
식극의 소마
한국명은 일본어 원제인 食戟のソーマ(쇼쿠게키노 소마) 그대로를 직역하여 쓰고 있지만, 이것의 영어명은 Food Wars!: Shokugeki no Soma. 그래서 여기서는 영어명에 주목해 볼까 싶네요. 식극은 음식[食]을 상대를 꿰뚫어 죽이는 데에 쓰는 창[戟]으로 격돌시킨다는 의미의 한자로 구성된 작중 신조어로, 작중 배경인 토오츠키 학원 내의 요리배틀을 말해요. 이 요리배틀은 요리실력의 우열만을 판가름하는 게 아니라 사전에 상대에게 요구할 대가의 조율이 합의되어야 성립되어요. 게다가 많은 경우 식극에서 지게 되면 교내 자치조직이 해체당하거나, 심지어 퇴학을 당하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로 대가가 무겁다 보니, 요리로 이루어지는 총력전의 연속이라는 게 보이죠. 그것을 선명히 나타내는 두 단어가 바로 Food Wars.
이 게임 폐인이 사는 법!
원제는 ネト充のススメ(네토쥬노 스스메), 직역하자면 "인터넷에 충실한 자에의 권유" 정도 되겠죠. 사실 이 제목의 기원은 케이오대학의 설립자이자 1만엔권 지폐도안으로도 유명한 학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의 저서 학문의 권유(學問ノスヽメ)를 유용한 것이긴 한데, 일본의 근대 출판문화 관련의 배경지식이 필요한 제목이기도 하고 그래서 직역했을 때에 우리나라의 실정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아요. 주인공 모리오카 모리코를 필두로 한 여러 등장인물들의 활동이 인터넷 게임으로 연결되고, 이 계기가 주인공이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인터넷 게임에 다시 손을 댄 것이 되다 보니, 완전히 새롭게 지은 저 한국어 제목이 적합하고 간결해서 좋다고 여겨지고 있어요.
이렇게 초월번역의 사례를 몇 가지 알아보았어요.
다음에는, 이와 반대로 번역없이 원제가 통용되는 사례도 볼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