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 국내사정을 몇 가지 회상해 보면 재미있는 것이 좀 있기 마련인데, 그 중의 하나가 일본 관련에 대해서는 틀려도 별로 문제삼지 않는 풍조였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이전에 쓴 글인
운주주판과 시네마현, 그리고 그 후일담. 시마네현(島根県)을 시네마현으로 잘못 써도 그게 잘못되었는지조차 모르다가 지적을 하자 그제서야 고친다고 할 정도로 지식이 없었던 것일까요. 사실 그것 정도는 애교에 불과합니다. 권위있는 학회에서 발간한 자료에서조차도, 1990년대 당시 신칸센 계획안에 들어있었던 호쿠리쿠신칸센(北陸新幹線)을 한국식으로 읽는데 호쿠리쿠 부분을 "북륙" 이 아닌 "북릉(北陵)" 으로 읽는 사례도 다수 있는 등 자구를 잘못 읽는다든지, 대체 언제 때의 자료를 인용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본이 공해병, 풍토병 등이 들끓는 미개한 국가라든지 저급한 문화를 향유하는 불결한 국가로 묘사된 것도 흔했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지적을 하면 돌아오는 말이,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일본에 대해서 잘 알지? 혹시 본인이나 가족이 친일파 아닌가?" 라는 반문이었습니다. 일본의 문물에 대해서 아는 것만 해도 친일파로 몰아도 되고, 그러한 점에 별로 의문조차 가지지 않았던 것이 주류였던 사회상이 이렇게 드러나는 것이었지요.
당시 신문에는 주말판에 자주 올라오는 기획기사 중에 이런 것도 있었습니다.
저질 왜색 일본문화를 몰아내자면서, 대구의 동성로, 서울의 명동 등지의 번화가에서 팔리는 무단복제음반이 절찬판매되고 있었던 속칭 길보드차트에 대한 성토가 자주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주로 언급되는 것이, 이시다 아유미(いしだあゆみ), 소녀대(少女隊) 등의 일본 가수의 저질 왜색노래가 청소년에 악영향을 미친다 하는 것이었는데, 판단은 여러분에 맡깁니다.
요즘은 그런 경향이 먼 옛이야기일 뿐이고, 채널J, 채널W 등과 같이 일본의 실사드라마 및 영화를 주로 다루거나 애니플러스, 애니맥스 등과 같이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자막방영하는 채널이 성업중이다 보니 옛날과 같을 수만도 없는 상황인데, 웃기게도 현재 북한에 좀 비슷한 사정이 있는가 봅니다.
몇몇 탈북자들이 전해오는 현재의 북한사정 중에 한국 드라마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유로 고초를 겪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한국드라마를 시청해서 문제가 된 것도 있지만, 나름대로 체제에서 충성심을 발휘하려 했다가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해서 배신감을 느껴 탈북을 결심한 것도 있다고 하네요.
주변의 누군가가 한국 드라마를 본 것을 알고 그것을 사회안전부나 보위부 등의 관 조직에 신고했다는데, 그 조직의 간부가 하는 말이, "어떻게 그게 남조선 드라마인 것을 알았는가. 당신도 그걸 봤으니 남조선 드라마인줄 알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 그래서 공범으로 몰려서 갖은 고생을 하고 체제에 대한 깊은 배신감을 느껴 목숨을 걸고 북한을 빠져 나온 사례도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아는 것과 가치판단은 별개의 문제인데, 그게 어느 시기에는 통용되지 않았다는 건 그래도 시대의 한계니까 하고 납득할 수는 있겠습니다. 옳지만은 않지만요. 그런데 그게 현재에도 여전한 곳이 있으니 그건 그것대로 불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