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쯤으로 기억합니다.
그 이전에는 아침일찍 대학에 등교해서 도서관에 가면 열람실의 책상에는 누군가가 사용중이면 그가 사용중인 책이나 필기구나 드물게 노트북 컴퓨터 등이 놓여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비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해부터 좀 다른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일단 누군가가 사용하지 않는 책상 위에도 무엇인가 인쇄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1997년말을 강타한 외환위기 및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게 된 그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 "이전 시대의 모순의 결론이 경제위기다" 라는 담론이 쓰여진 인쇄물이 아주 흔히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학구내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때보다는 이후의 일이었습니다만 어쩌다 장거리 열차를 타면 좌석 앞의 그물주머니에 소책자 형태의 정부간행물이 있기도 했습니다. 43시간만에 사임한 장관이라든지 옷로비 사건이라든지 하는 비리가 연발하자 내놓은 정부간행물의 요지는 대략 이런 것이었습니다. 깨끗한 세상이 되었으니까 전에 보이지 않은 비리가 새로이 보이게 되어서 논란이 많은 거라고.
이전 시대의 모순이 누적되어서 위기가 타졌고 세상이 깨끗해진 덕에 전에 안 보였던 비리가 새로이 보였다는 담론은 굳이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상당부분은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그 시기를 보낸 사람들이 유독 요즘에는 그런 논리를 구사하지 않습니다. 특히 저와 동년배들이거나 대학에서 바로 만났던 후배들 그리고 선배들을 포함한 40-50대 사람들의 다수가 그 시기를 거쳤지만 이상하게 그때의 담론을 부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다는 것일까요. 무엇이 그렇게 그들의 신념의 기축을 바꾸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확언할 수 있는 건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때는 과거 시대 탓, 지금은 현재 탓을 하고 탓할 게 없으면 자신을 탓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 그렇게 신념을 쉽게 뒤집은 자들이 내탓이오(Mea culpa)를 말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세대에 떠넘기면 더없이 편할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