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저는 퇴원 후 다시 두 발로 서는 게 가능해진지 한 분기를 조금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통원치료도 가능해졌습니다. 물론 완전히 혼자서 통원치료는 불가능해서 동생이 운전하는 자동차에 첨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보니 상반기 때보다는 조금 희망적이었습니다. 매일의 재활훈련이 확실히 그리고 언제나 보람있었으니까요.
자신의 힘으로 앉고, 일어서고, 움직이고 하는 것이 투병생활 이전에는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투병생활 이후에는 행동 하나하나가 의미깊게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완치되어 불편없이 활동중인 지금도 이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분명 그 시기는 매우 힘들었습니다만,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으렵니다. 최소한 15년 전의 투병경력은 당연히 여겨진 것들의 의미를 생각해 볼 기회는 되었으니 이렇게 생각하렵니다. 자기합리화라는 비판을 듣더라도.
음악 한 곡을 소개합니다.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의 악극 탄호이저(Tannh?user)의 서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