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제목에 쓰인 '번밀레'가 뭔지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익숙한 어감에서 아시겠지만 '번역 + 에밀레(종)'이란 뜻으로, 이보다 앞서 생긴 '공돌이(이것도 사실 남자 엔지니어의 희화화된 비하명칭입니다) + 에밀레(종)'이란 "공밀레"란 속어의 파생형입니다. 그러니까 문자 그대로 번역가를 갈아넣어서 완성한 물건이란 얘기죠. 이런 말이 사용될 정도면 번역가에 대한 대우가 얼마나 열악한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왜 '번역청' 이야기가 나왔는가 하면... 번역 관련하여 나무위키 등의 커뮤니티를 뒤지던 차에, "2018년에 박상익 교수(추가조사 결과 우석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라고 합니다. 이하 호칭 생략)가 청와대 국민청원에 '번역청을 설립하라(링크(고장), 신동아 인터뷰로 대체)'라는 제목으로 국가 차원에서 번역가 육성 및 지원을 촉구하며 같은 제목으로도 책을 냈지만, 황석희 번역가(역시 이하 호칭 생략)는 ㅍㅍㅅㅅ에서 '번역청 같은 걸 어디에 쓴다고'라는 제목으로 반론을 제기했다"는 문장을 봐서입니다.
저는 일단 황석희의 말에 동의합니다. 이미 반론에서 충분히 설명했듯이 '번역청이 무슨 일을 할 것이며 번역가들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라는 취지부터가 굉장히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황석희의 반론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박상익의 주장에서는 '대학에서의 학술적 번역 = 모든 번역'이라며 굉장히 포괄적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당 주장을 "'인문학과 기초학문의 부흥을 위하여'라는 취지에서 번역청을 창설하고 고전번역을 지원하라"라고 해석하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만, 황석희가 반박한 바와 같이 '학술적 번역이 전부인가? 정부 차원에서 번역계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음악이나 미술 및 영상 등의 다른 문화계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는가?'라는 막막한 의문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물론 박상익은 학술적 번역이고 황석희는 상업적 번역, 즉 애초에 출발선과 입장이 다르다는 점은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황석희는 더 쉬운 해법을 제시합니다. 바로 '번역의 대가와 권리를 온전히 보장할 것'이죠. 이건 목적이 연구냐 문화사업이냐 따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전방위적이거니와, 번역단가라는 '실물'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고무적이고 해당 영역을 더욱 확장시킬 수 있게 도와주죠. 분명 학술적 번역도 중요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의 파급효과가 무엇이며 그 실질적인 파급력은 백년지대계마냥 훗날에나 밝혀질 상이죠. 게다가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상업작품을 먼저 접하고 그것의 토대가 되는 학문(역사, 철학, 과학...)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는 걸 감안하면, 오히려 '뭐든지 항상 학문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폐쇄적인 사고방식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차라리 '(교수가 됐든 일개 번역자가 됐든) 번역의 대가를 온전히 받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죠. 전문지식이 부족한 사람이 번역을 맡아서 일을 그르칠까봐 전전긍긍해도 시행착오를 통해 수습할 수 있는 것과, 돈이 안 된다고 아무도 손조차 대지 않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낫겠습니까? 단가만 맞다면(If the price is right) 학자 혼자서 번역하든 학자가 외부 번역가와 협업하든 상관 없는 것이니까요. 상호보완을 기대할 수도 있는 것이고.
황석희의 반박문에 달린 어느 페이스북 댓글은 (사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도저히 모르겠지만) '일본은 번역청을 설립하여 기초문학과 기초과학의 누구나 공부할 수 있게 기틀을 닦아줬다'면서 '출판사에서 돈이 안 되는 전공서적이나 고대전문서적이라도 정부에서 주도적으로 번역해줬으면 좋겠다'라고 하는데, 이건 그냥 '나 원서로 공부하기 싫다'는 징징거림인 것 같으니까 넘어갈게요. (사실 이 댓글 자체가, 링크한 신동아 인터뷰를 그냥 복사&붙여넣기한 것에 가깝습니다) 애초에 원서를 번역해주지 않아서 학문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논리 자체가, 옛날에 논리야 놀자 시리즈에서나 나오던 '공부방이 없으니까 공부를 못하는 거야'랑 뭐가 다른 건지 궁금하네요.
반면 브런치에서 띤떵훈이란 사람이 쓴 "번역청 건립을 둘러싼 논의(링크)"는 전후맥락 파악에 되는 참고자료도 많고 훨씬 중립적입니다. 게다가 매우 중요한 얘기를 했는데, (나무위키 글이라 다른 사람이 말했겠지만) 바로 '해당 외국어 실력, 번역 경력만이 아닌 해당 학문, 분야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학술적 번역이건 상업적 번역이건 마찬가지이고, 정론이니 더 이상의 보충설명은 넘어가겠습니다. 그리고 좋은 지적을 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번역청만이 아니라 거기서 일할 공무원들을 어떻게 선발할지에 대해서입니다. 이건 매우 복잡하고 사실상 모순입니다. 기준에 맞지 않으면 모조리 퇴짜를 놓는 게 관료제인데, 그런 걸 번역에 도입한다고요? 사람 생각만큼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는데, 이걸 국가 공무원 한 명이서 결정하겠다고요? 이미 존재하는 '번역사 자격증'도 왜 실효성이 없겠습니까. 국가시험을 통과했으니 항상 옳은 번역만 하리라는 건 너무 안이한 생각 아닌가요? 번역만큼 시장경제의 효율적인 칼부림에 깎여나가는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황석희의 반론과 같이 '권리 보장'이 가장 중요한 거고요. (사실 이건 비단 번역가만이 아니라 노동계 전반적인 문제이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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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담고 있는 직업과 관련된 글을 봐서 그런지 오래간만에 길게 주장을 적었네요. 다소 열받아서 쓴 내용도 있다보니 과격해 보이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학술적 번역을 모든 번역으로 치환하는 듯한 사고방식은 화가 안 날 수가 없어요. 상업번역을 저질 취급하는 건가 싶기도 해서. 애초에 2018년, 그러니까 4년 전의 논의에 더 화내봤자 의미는 없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박상익도 (신동아 인터뷰에서) 언급했듯이, 결국 번역청 논의는 흐지부지된 모양이고 국민청원 글도 증발했습니다.
하지만 번역가(더 나아가 노동계 전반)의 처우개선은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제값을 못 받는다는 문제도 있지만, 정말 잠재성과 실력이 내재된 사람들이 그 분야를 떠나서 결국 말라죽게 된다는 문제가 더 큽니다. 그것을 박상익은 학술적 차원에서, 황석희는 상업적 차원에서 바라본 거죠. 그리고 저는 역시 상업분야에 몸담는 것도 있지만, 우리나라 학문이 실생활과 얼마나 괴리가 있는지를 감안했을 때 학술분야에는 딱히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황석희의 손을 들어주는 거고요.
뭐 이렇게 길게 얘기하긴 했지만 저 역시 일개 번역가일 뿐이고, 따라서 제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포럼 회원 분들의 생각도 같이 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p.s. 써놓고 보니 예전에 이와 비슷한 글을 이미 올렸던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네요. 예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도 되돌아 볼 겸 포럼 예전 글들을 찾아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