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이었는가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일본과의 마찰이 있으니까 일본산 영상물 방영을 중단한다든지 철도의 안내방송 중 일본어 부분을 삭제한다든지 하는. 그런 것들이 여전히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터라 요즘의 방송광고 중에 기묘하게 들리는 것이 있습니다. 이미 제목에서도 언급한 "러시아산 녹용" 이 바로 그것입니다.
녹용이 얼마나 영약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녹용을 먹고 1천년은 커녕 200년도 넘게
살아있는 사람은 과문의 탓인지는 몰라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하니 저에게는 관심밖의 존재입니다. 저 또한 어릴 때 한약을 복용한 적이 있었고 그 안에 녹용이 들어 있는 것은 알았지만 갑자기 병으로 쓰러져 15년 전 그 해를 투병생활과 재활에 주력해야 했던 경험도 있었다 보니 녹용이 영약이 아닌 것은 더더욱 확실합니다. 게다가 당장 시외만 하더라도 사슴농장이 몇 개
있는데다 그런 데서도 녹용을 생산하다 보니 녹용이 러시아에서만 나는 것도 아닌데다 이미 영약도 무엇도 아닌 것이 증명된 이상 러시아산이라고 해서 그 녹용이 굉장한 양 어필하는 것은 이상하다는 것은 누구도 느끼지도 않는 것일까요. 그래서 더욱 기묘합니다.
아시다시피 올해에는 2월 24일에 발발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이 학살당하고 있고, 세계적인 농업국이자 자원부국인 우크라이나가 농산물 수출을 못하게 되면서 글로벌 식량위기 및 원자재 수급불안이 가속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침략국 러시아의 달러박스인 석유와 가스에 대해서도 탈러시아화가 진행되고 있고, 세계최대의 국제기구인 국제연합(UN)에서는 러시아가 인권이사회에서 퇴출되는 등 전방위로 침략자 러시아를 배척하는 조류가 거세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군에 격추되어 그 KE007편의 탑승자 전원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대참사 직후 소련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전국을 울렸던 것도 기억납니다. 당시 TV 화면에는 전국 각지에서 소련의 만행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리는 게 자주 비치기도 하였고, 다음해 나온 어린이용 잡지에는 소련의 만행과 제2세계의 비인간성을 비판하는 동물 우화도 실리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39년 뒤의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화상연설은 국회도서관에서 소규모로 열리고 참가한 국회의원들조차 극소수에 연설에 집중하지도 않으며 방송에서는 러시아산 녹용 광고는 잘만 나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셈인지 권위주의 시대보다 민주화된 시대의 시대정신(Zeitgeist)이 더욱 퇴보해 버린 역설이 발생해 버린 것입니다.
지난 시대의 역사 또한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현재를 살고 미래를 향합니다. 그래서 과거를 위해서 현재와 미래도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특히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 중의 하나인 우리나라에는 특히 이것이 강하게 요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정작 그런 것 같지만은 않습니다. 지난 시대에 있었고 이미 단죄된 일본의 만행을 비판하는 만큼 현재의 러시아의 진행중이고 단죄되지 않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비판을 받는 중인 러시아의 만행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 러시아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응원은 수반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글쎄요. 당장 러시아산 녹용이 더 중요한 이 나라에 기대할 수 있는 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일본이 아니니까 반응할 이유도 없는 것일까요.
시대정신이란 드라마나 영화나 음악 몇 편이 세계에서 인기를 끈다고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세계를 보고, 부조리에 분노하고 아픔에 공감할 수 있어야 만들어집니다. 이미 시대정신은 없으니, 우리나라의 운명은 불청객(Ein ungebetener Gast)이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