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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 로봇: 결단과 역설 사이

마키 2022.05.18 00:08:32

*이하의 내용은 드라마 체르노빌 4화의 내용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biorobots-on-the-roof-420x291.jpg

(사진기자 이고르 코스틴에 의해 촬영된 체르노빌 발전소 건물의 제염작업중인 "바이오 로봇"의 사진.)



폭발 사고 후 4개월이 흐른 체르노빌.


살인적인 양의 방사성 물질을 내뿜는 원자로 4호기를 잠재우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고안되었지만, 일단 노심과 건물의 잔해가 흩뿌려진 발전소 건물의 옥상을 치워야 뭘 시도라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체르노빌 발전소 건물의 제염 작전이 구상되죠. 옥상은 오염도에 따라 세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고, 시간 당 1천에서 2천 뢴트겐의 방사능을 뿜어내는 "카탸"와 "니나"는 그나마 양호한 상황이었지만 다른 한 곳, "마샤"는 시간당 1만 5천 뢴트겐이라는 살인적인 수치가 계측되어 별 도리가 없는 상황.


제아무리 인명경시로 유명한 소비에트 연방이라 할지라도 이런 지옥에 사람을 들이민다는건 말도 안되는 소리였기에 우선 기계의 도움을 받기로 하죠. 월면탐사차 루노호트를 개조한 일종의 원격조종 불도저 로봇으로 옥상의 잔해를 노심쪽으로 밀어 치우는 방식으로 제염 작업이 진행됩니다. 허나 로봇이라고 방사능 피폭의 위험성 앞엔 별다를건 없기에 옥상 바닥과 잔해에서 뿜어져나오는 방사능에 로봇들 또한 얼마못가 고장나고 말죠.


결국 소련은 자존심을 굽히고 독일에 제염 작업용 원격 조종 로봇을 수입해오기로 합니다.



독일 기술자들이 붙인 로봇의 이름은 "조커", 전대미문의 재앙에 덤벼드는 인류의 히든카드 라는 의도로 작명된 것인지는 몰라도 조커는 말 그대로 비장의 패로서 마샤의 제염 작업에 나섭니다. 처음에는 그 성능에 "과연 독일이야." 하고 감탄하던 인원들이었지만 얼마못가 조커의 화면송신이 끊기고, 조종 담당 병사가 '신호는 정상인 것을 봐서 로봇의 고장으로 보인다'고 대답하자마자 무언가를 직감한 셰르비나는 그대로 상황실을 뛰쳐나갑니다.


얼마 뒤 고르바초프와 리즈코프를 비롯한 당 관료들을 저주하며 "책임자 놈들 다 나오라고 해!! 지금 여기 상황이 어떤지 알고 이따위 수작질을 벌이냐고!!" 고함을 내지르는 셰르비나의 노성이 들려오고 잠시 후 너덜너덜해진 전화기를 내던지며 나오는 셰르비나. 당이 자존심을 위해 사기를 쳤다는 소식을 일행에게 전하면서 병사에게 "전화기 하나 새로 갖다두게"라고 주문하고, 이렇게 로봇에 의한 제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게 알려지죠. 이후로도 지붕의 흑연을 치우기위해 온갖 탁상공론이 벌어지던 와중 결국 상황실은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 동의하게 되죠.



일명 바이오로봇(Biorobot). 사람은 맨몸으로는 몇분도 채 버티지 못하는 곳에 사람이 들어가서 치워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죠. 물론 일이 이 지경이 됐어도 그냥 맨몸으로 내보낸다는건 어림도 없는 소리. 두꺼운 화생방 보호의에 납을 기워 무게만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하지만 조악하지만 없는 것보단 나은 방사능 제염복도 만들어 투입하게 됩니다.


어마어마한 오염도와 작업에 투입될 인원들의 피폭량으로 추정한 인당 작업시간은 단 90초. 가진건 인적자원 뿐인 소련은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을 모아 방사능 제염복을 입히고 90초의 제한시간으로 로테이션을 돌리며 마샤의 제염 작업에 돌입합니다. 이러한 바이오 로봇의 희생으로 체르노빌 원자로 건물의 제염 작업은 어느정도 활로를 찾게되죠.


드라마에서 이 부분은 어떠한 배경음악도 없이 오로지 가이거 계수기의 계측 소리와 방독마스크의 호흡 소리만 들려오는 연출이 압권. 헌데 이 장면에서 제염작업을 하던 병사 한 명이 미끄러지면서 잔해에 발이 끼이게 되고, 이를 빼는 과정에서 장화가 찢겨졌다는게 드러납니다. 이를 본 지휘관의 말은 "병사동지. 이제 끝났네.("Comrade soldier... You're done")".?


병사의 작업 시간이 끝났음을 선언하는 동시에 방사능 피폭으로 병사의 인생이 끝났음을 선고하는 중의적인 의미의 대답이죠...






드라마 4화는 전체적으로 전대미문의 재앙과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지면관계상 다루지 못한 지하 작업을 위한 광부들도 처음 자신들이 어디 가는지 몰랐을때는 가는 곳이라도 알려주라고 실랑이를 벌이지만 자신들이 가는 곳이 체르노빌이라는 사실을 알고, 조국과 인민을 위해 목숨을 내어달라고 요청하자 기꺼이 응합니다. 동시에 현장의 최고 책임자라 할 수 있는 레가소프나 셰르비나가 별다른 방호구를 착용치 않은 맨몸인걸 보고 이미 그러한 것이 전혀 쓸모가 없는?위험한 장소임을 직감한듯한 묘사도 나오죠.?


동시에 알량한 자존심을 사수하기위해 이 상황에서도 거짓말을 일삼는 정부 권력의 그림자도 비추어지고 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