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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간에는 수능을 보고 있다죠 (+ 번역가의 길)

Lester 2021.11.18 14:36:39

저는 08학번이니까 2007년쯤에 수능을 봤겠죠 아마. 이젠 뭐 기억나지도 않네요. 어디로 갔는지, 점심을 어떻게 대충 때웠는지, 수능 끝나고 어땠는지가 수능철만 되면 기억납니다. 아주 간단했어요. 아버지가 저 데리러 차 가져오셔서는 간단하게 물으셨습니다.

"끝났냐?"

"네."

"수고했다. 뭐나 먹으러 가자."

그리고 한옥마을에서 짜장면 먹고 귀가했죠. 그리고 평상시와 다름없는 평일을 보냈습니다. 제가 원체 재미없는 사람이라서요. 수능 끝난 고3은 막 날아다닌다던데 저는 그 때 대체 뭘 했는지 생각이 안 날 정도로 무미건조하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야자 시간에 남들처럼 붙잡혀 있지 않고 자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보니 그 해방감(?)이 크게 와닿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렇게 전북대 인문학부(그마저도 1년 뒤에 사학과로 통폐합)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4년의 방황을 거쳐 후에 아는 사람만 알아주는 게임번역가가 되었죠. 아주 간단하죠? 고등학교 내내 '이걸로 네 미래가 좌우되는 거다'라고 들었던 거랑은 딴판이었습니다. 물론 어느 대학을 나왔냐는 것 자체가 크게 작용하긴 하지만, 학과까지 들여다보진 않는다는 걸 감안하면 글쎄요...


꼴찌 동경대 가다(원제: 드래곤 사쿠라)에서 시험을 편하게 보는 법 중에 하나가 '뭐야 별 거 아니잖아'라는 마음가짐이라고 합니다. 옛날 명언 중에 하나인 '이 또한 지나가리라', (아마도) 성경의 '하느님은 이겨낼 수 있는 시련만 주신다'와 일맥상통하죠. 그 당시의 제가 이런 명언을 마음에 품고 수능을 대충 봤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야자 시간 동안 경주마처럼 수능만 보고 달리진 않고, 인터넷을 뒤지며 이런저런 문화를 섭렵했더니 저만의 무언가를 찾은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저 나름대로도 노력했죠. 정말로. 안 그러면 부모님을 뵐 낯이 없으니까.)


현재 제 지인들 중에 수능을 볼 만한 나이의 사람은 없습니다만(20대 한 명이 있는데 대학 진학을 보류중입니다), 수능을 앞두거나 본 사람이 있다면 고등학교 내내 공부에 매진하는 것은 학생의 신분상 맞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라는 것만큼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수능을 잘못 봤다고 자기 목숨을 끊거나 하는 일이 벌어진다거나 할 때마다 슬프죠. 재수를 할 여건이 안 되더라도, 자기 재능을 알고 있으면 어떻게든 꽃피울 방법이 있을 터인데. (뭐 저라고 재능을 꽃피운 건 아니라서, 언제 떠나갈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6시가 지나면 고3들이 우르르 몰려나와서 연말이 한껏 떠들썩해지겠지만, 코로나 때문에 옛날만큼 시끄럽진 않을 것 같네요. 제가 사는 동네가 번화가랑 거리가 있어서 고3들 보기도 힘들기도 하고... 뭐, 그저 수능이라는 한 고비를 무사히 넘긴 걸 축하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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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나왔던 게임번역의 후속편입니다. 정확히는 그 다음 달인 8월에 있었던 일인데 이제 생각나서 써 봅니다.


정확한 사정은 이렇습니다. 해당 번역과 관련이 있는 팀 동료가 좀 더 정확한 검수를 위해서 저한테 잠깐 검토해 달라고 했답니다. 듣기로는 모종의 일정이 있는지라 급히 작업했고 개발자도 중개인의 한국인 친구도 '나쁘지 않네'라고 했다네요. 그런데 제가 봤을 때는 이전 글에 적었듯이 영 아니었어요. 중요한 부분은 남아있지만 미묘한 포인트도 사라지고 쓸데없는 문장부호도 들어가는 바람에 문장을 분위기에 안 맞게 틀어버렸거든요. 그래서 저는 "의뢰인이 됐다고 한다면 나야 아무 상관없지만, 내 기준으로 봤을 때는 영 아니다"고 답변하고 검수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괜히 저걸 제 실력에 의한 결과물이라고 통과시켜서 덤터기를 쓰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 결과, 8월에 저한테 다시 연락이 와서 봤더니 "이거 (처음부터) 재작업해야 하는데 시간이 있느냐" 물어보더군요. 그 쪽에서 알아서 하기로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팀 동료 왈, 자기랑 협력한 퍼블리셔가 "번역 품질이 열악해서 해당 일정에 맞출 수 없다, (한국어) 원어민이 말한 것 같지 않다"고 했다더군요. 그러면서 개발자가 하는 말이 '이미 기존 번역자가 자기 몫의 번역료를 가져가는 바람에 재번역에 대한 돈은 더 낼 수 없다'고 합니다. 그거야 철저하게 확인하지 않은 개발자 잘못 아니냐고 팀 동료한테 푸념을 늘어놓으면서도 제가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가에 해주겠다고 했습니다만, 이후 아무 연락도 없어서 (오늘) 물어봤더니 결국 퍼블리셔가 직접 작업했다고 합니다. 말이 그렇지 다른 사람을 썼을 거에요. 단가 때문이든 뭐든.


아무튼 그런 해프닝이 있는 대신, 팀 동료가 해당 개발자의 다른 차기작은 저한테 번역을 맡기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글쎄요? 해당 게임의 특색이 없으면 번역 실력을 갈고 닦는 데엔 도움이 되겠지만 저 자신을 알리는 데엔 별로 도움이 안 되거든요. 물론 거래처 확보, 그러니까 개발자와 친해져서 그 사람이 만든 게임을 독점(?)하게 된다는 이점은 있겠지만요. '갓겜(엄청나게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 때까지 천년만년 기다려 줄 수는 없겠지만, 나중 일이라는 건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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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스토리 RPG의 경우 현재까지 예고된 업데이트의 번역을 (일정을 착각하긴 했지만) 미리 끝내둔 덕분에 그 여력을 스톤샤드에 쏟을 수 있었는데,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개발자가 "너네 언어(한국어)가 읽고 싶을 만큼 깔끔하다, 모든 언어들 중에서 가장 멋지다"라고 덕담을 해줬습니다. 그리고는 조만간 모바일 버전이 나오면 "한국에 가장 먼저 발매하겠다"고 하더군요. 모바일 버전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텍스트는 원작을 따라가고 포팅 과정에서 달라지는 조작이나 몇몇 요소들만 추가 번역하게 될 테니, 어지간해선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고전게임을 많이 좋아하는 편인데, 스톤 스토리 RPG는 그 특유의 아스키 그래픽이 옛날 생각이 나게 해줘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RPG라는 점은 다소 마음에 걸리지만요)


남은 퀘스트 업데이트의 번역도 큰 무리 없이 번역이 끝나면 스톤 스토리 RPG는 더 걱정할 게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