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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수업] 다른 산의 돌 - 패러디와 트라우마

Lester 2021.09.16 22:37:48

0-1. 제목은 그냥 타산지석이라고 쓸까 하다가 뭔가 밋밋하게 느껴져서 그냥 풀어서 썼습니다.


0-2. 요새 들어온 번역작업들의 마감이 1~2주일 간격으로 있다 보니 정리하느라 다소 애를 먹었네요. 일단 급한 것부터 하나 끝내두긴 했지만 아직 해당 프로젝트의 급하지 않은 부분들도 몇 주 내로 처리해야 되다 보니 정신이 없습니다. 오늘은 분명히 (8시간 정도) 푹 자고 일어났는데도 하품이 끊이질 않고, 결국 혼자서 외식 좀 하고 왔더니 코피가 터져버리더군요. 뭐 코피야 하도 겪어봤고 옛날만큼 심하진 않아서 얼른 멎긴 했지만...


0-3. 어쨌든 고독한 미식가가 되어 외식을 하는 동안 나무위키에서 몇몇 문서를 봤는데, 평소에 눈여겨보던 "명탐정 코난/비판" 문서를 읽다가 이거다, 싶은 점들이 몇 가지 눈에 들어왔습니다. (작업 핑계도 있지만) 연재 방향에 난항을 겪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 돌파구가 되는 것 같아서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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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의 내용은 만약을 위해 명탐정 코난의 스포일러를 차단했으나, 무심코 누설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1-1. 일단 명탐정 코난은 초장기연재 중이라 전형적인 '결말이 보이지 않는 만화'이고, 그런 만큼 주조연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리고 작품 내외적으로 드러난 1차 목표는 "검은 조직과 싸워 이겨서 원래의 몸인 고등학생으로 돌아가는 것"이기도 하죠. 그 결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려진 상태에서 이런저런 인간관계를 쌓고, 그 중에서 협력자도 많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상술했듯이 초장기연재이다 보니 기존 설정이 유지되지 않고 도중에 모종의 사유로 변경(혹은 변질)되거나, 이를 보완하기 위해 새로 추가한 설정이 기존 설정과 충돌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면상 모든 비판에 대해선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1-2. 이 중에서 제가 영감(?)을 받았던 비판 중 하나는 바로 '특정 캐릭터 편애'였습니다. 작품 도중에 검은 조직의 구성원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아군이었다는 인물 A가 있고 이후에 비슷한 컨셉으로 B가 등장하는데, 여기까진 좋지만 이 A와 B에 대한 작가의 편애가 점점 도를 넘고 있다고 하네요. 본편에서는 주인공인 코난/신이치의 배경설정을 구체화하는 게 아니라 A의 가족사를 털어놓느라 여념이 없고, 그것도 모자라 A 위주의 극장판을 만들기까지 하니... 이는 나중에 비슷한 컨셉인 B도 똑같이 답습합니다. 그 와중에 B와 비슷한 시기에 추가된 C가 있는데, 이 C는 원래 히로인인 모리 란의 자리를 넘본다거나 알고 보니 A와 같은 가족이었다거나... 이 문단만 놓고 봐도 명탐정 코난의 주인공이 코난인지 A, B, C인지 헷갈릴 지경이죠.


1-3. 물론 비중이 다소 크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비판의 대상이 되는 건 아닙니다. '명품 조연'이라는 말도 있고 매력 있는 캐릭터는 그 자체로 큰 역할을 수행하고 또 큰 사건을 만들어 내기 쉬우니까요. 하지만 상술한 A와 B, C는 유래를 따져보면 사실 명탐정 코난(더 나아가 그 모티브인 셜록 홈즈 시리즈)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오히려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와 관계가 있습니다. 엄밀히는 A가 추가된 시점까진 별 문제 없었습니다. 해당 성우가 맡은 유명한 캐릭터, 샤아 아즈나블에 착안했을 뿐이거든요. 그러나 작가가 그 A의 개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A의 유래인 샤아와 관계가 있는 아무로 레이를 모티브로 삼은 B(더 나아가 C)를 추가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홈즈 시리즈나 코난과는 관계가 없어요. 그럼에도 이 셋이 판을 치고 있으니 마치 '사실 주인공은 이 셋이었고 검은 조직의 정체는 지온 공국이라더라', '어차피 작가로서 못 끝내는 작품이니 좋아하는 캐릭터나 가지고 놀자' 같은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올 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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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그렇다면 명탐정 코난에 대한 비판이 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면, 제 작품 역시 비슷한 요소를 어느 정도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대강당이나 아트홀에서 DLC라는 이름으로 몇 번 언급했던 패러디 에피소드죠. 뭐 원래 구상했던 본편에 절대로 영향을 주지 않도록 '이 에피소드는 본편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같은 느낌으로 '이 에피소드를 읽으려면 DLC가 필요합니다' 같은 장난스런 문구도 넣고, 실제로 이런 패러디 에피소드는 해당 작품을 제 세계관으로 가져와서 녹여내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2-2. 하지만 그런 생각도 들더군요. '본편의 주조연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모티브로 삼은 캐릭터'와 '패러디 캐릭터'는 무슨 차이인가? 주조연 캐릭터의 개성조차 살리기 힘든데 패러디 캐릭터는 오죽하며, 내 세계관에서 제대로 녹여낼 수 있기는 한가? DLC라는 '참신한(?) 요소'만을 위해 더 큰 것을 잃고 있지는 않는가? 쉽게 말해서 본편의 진도조차 나가지 않았는데 DLC를 꿈꿔봤자 무슨 소용인가, 하는 것이죠. 마음만큼은 벌써 몇십권 분량을 구상하고 있지만 실제로 연재한 내용은 꼴랑 3편이라는 극심한 괴리감도 있고...


2-3. 특히 DLC라는 요소에 대해 사고방식을 '있으면 좋다'가 아니라 '왜 있어야 하나'로 바꿔봤더니 갑자기 허망해지더군요. 있으면 좋기는 한데, 과연 몇 명이나 알아볼까? 원본에 대해 추가로 설명해야 하는 것도 수고롭지 않을까? 재미는 있을까? 오히려 본편보다 재미있고 내용이 알차면 주객전도이지 않을까? 그리고 DLC를 생각해 낸 것은 분명히 '패러디의 명문화(明文化)이자 공식화, 작품의 질의 다양화'라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해서? 인정받으려고 넣은 것인가? 무엇을 DLC로 담아야 할지 강박적으로 소재를 찾아다니고 있지는 않은가? 애초에 본편도 소재 때문에 고생하고 있으면서?


2-4. 이렇게 되니 DLC라는 이름으로 여러 작품을 패러디하여 '공식적으로' 투입시키려는 노력 자체가 애초에 무리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구나 어차피 원본이 뭔지 모른다면 차라리 저만 아는 상태에서 주조연 캐릭터의 모티브로 삼아 영양을 보충(?)하는 게 낫겠다 싶은 생각도 솔직히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초 계획이 '어느 작품이나 캐릭터를 내 세계관에 가져와서 내 식대로 표현한다면'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어느 작품이나 캐릭터를 참고하여 내 세계관을 보충한다면'이 되는 거죠.


2-5. 예전에 대강당에 패러디 관련하여 글을 몇 번 올렸을 때 마드리갈님이나 SiteOwner님 외 몇몇 분들이 '패러디가 의무는 아니다'라고 답변을 주셨던 것 같은데 먼 길을 돌아온 것 같아서 다시 허망하네요. 거 봐, 내가 뭐랬어 하는 자괴감도 들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DLC 에피소드는 추가 1개밖에 없기 때문에, 해당 추가 에피소드를 파일럿(비공식)으로 돌리고 그 외에 계획했던 DLC는 모조리 폐기처분해서 청산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괜히 또 갖고 있으면 미련이 생기니까요. (사실 기존에 연재한 추가 에피소드들 중에는 명시하지 않았다 뿐이지 DLC에 가까운 것들도 몇 개 있습니다. 출처를 밝혀도 의미가 없을 정도로 깨작깨작한 것들이라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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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비판 문서를 읽으면서 또 하나 영감을 받았던 부분은 바로 '트라우마' 문제였습니다. 정확히는 이 부분은 코난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작품에 해당됩니다. 추리물에서 주인공 일행이 '연달아' 시체를 보거나 사건을 겪어도 후유증이 생기지 않는다거나, 배틀물에서 '계속해서' 상대를 제압하거나 죽여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래야 이야기 전개에 유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더군요. 그런 후유증이나 죄책감을 묘사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풀기 위한 이야기를 또 풀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본래 의도했던 추리물이나 배틀물 등 장르의 성격이 흐려지기 쉽다는 겁니다.


3-2. 그렇다고 100% 맞는 말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당장 해외 코믹스에서는 히어로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영웅답게 고뇌하고, 또 해외 코믹스가 아닌 몇몇 만화에서는 주인공 일행에게 트라우마가 생길 법한 사건 자체가 작품 전체에서 분기점이 되기도 하니까요. 그런 트라우마들은 주인공의 성격을 바꾸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더라도 장르적 특징을 해치지 않는 선에 그칩니다. 가령 추리물에서 주인공이 어느 사건을 통해 트라우마를 겪었을 경우, 성격이 바뀌더라도 '추리를 하는 이유나 가치관'에 그치지 '추리를 하지 않는다'가 되진 않습니다. (ex. 소년탐정 김전일 시리즈의 2부라고 할 수 있는 김전일 37세의 사건부의 경우, 입으로는 추리를 하기 싫어한다고는 하지만 작품 성격상 어쨌든 추리 자체는 계속하고 있습니다)


3-3. 그럼 이 부분은 또 제 작품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하니, 이전에도 다뤘던 레스터의 '죄책감' 문제였습니다. 사건 해결에 어디까지 개입할 것인가 하는 문제죠. 초창기에 글쓰던 것처럼 그냥 존과 함께 총 들고 일선에서 날뛰는 건 솔직히 꺼림칙했습니다. 아무래도 저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니까 말이죠. 그런데 방금 말했듯이 초창기에는 그런 죄책감 따윈 전혀 없었거든요. (사회화의 영향일지도) 그런데 위의 이론(?)을 읽고 보니까, 오너캐라고 이렇게 감싸고 도는 것도 하나의 '편애'이자 '괜한 걱정'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어차피 창작물이고 현실의 저한테 특별히 해가 될 것은 없으니까요. 초창기에 썼을 때는 GTA 세계관이니까 폭력적이어야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3-4. 그렇다고 오퍼레이터로만 등장시키는 건 묘사상의 문제도 있고 비중 면에서도 소위 '페이크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 있다보니, 존과 같이 일선에서 활약하더라도 폭력을 얼마나 사용할지가 관건이겠네요. 일단 트리거 해피는 절대 아니니까 어느 글에서 언급했듯이 경찰처럼 '제압'에 중점을 두도록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적들이 레스터만 맞추지 않는다는 보장(이라기보단 주인공 보정)은 없으니까요. 8~90년대 홍콩 영화에서 적들이 무한탄창 쌍권총 앞에 우르르 쓰러지듯이 명확하게 '죽었다'가 아닌 '쓰러졌다'고만 표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아니면 레스터가 처음으로 사람을 쐈는데 죽지는 않았고, 명확하게 생명을 구한 정당한(?) 발포였다고 첫인상을 심는 것도 중요할 것 같고... 이 점은 사전에 납득이 될 만한 묘사를 잘 깔아둬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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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 2개로 나눠서 쓰려던 걸 글 하나에 밀어넣었더니 얘기가 많이 길어졌네요. 어쩌다보니 늘 그렇듯이 자문자답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만 아직도 확신은 없습니다. 재미삼아 쓰는 거, 이렇게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의미없는 짓일지도 모르지만요.




p.s. 굵은 글씨는 나중에 제가 예전 글을 읽어볼 때 요점만 파악하기 쉬우라고 해놓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