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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라는 마법

마드리갈 2020.09.26 15:07:08

이번주에 일어난 엽기적인 살인사건에 대한 반응은 그야말로 마법 그 자체.


이번 사건을 요약하면 어업지도선에 승선해 있던 공무원이 바다에 빠져 실종중이었다가, 북한측에 발견된 후 살해당한 사건.

만일 "북한" 부분이 지워졌거나 다른 것으로 대처되었다면, 분명 천인공노할 만행이라는 비난이 속출하는 것은 예상가능한 일. 그런데 여기서 북한이 등장하니까 참으로 대단한 일이 벌어지네요. 죽은 사람에 대한 연민, 죽인 사람에 대한 분노는 온데간데없네요. 그리고 나오는 말은 김정은이 계몽군주라느니, 전화위복의 계기라느니 하는 등등의 것. 표현의 자유가 있어서 참 좋네요.


그리고, 북한이 했다는 사과 또한 글쎄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왜 이게 무의미한지는 3가지로 요약가능해요.


첫째, 사과의 실재성 및 공신력.

김정은이 했다는 사과는 본인이 발표한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우리나라 쪽에 보내 온 문서를 우리나라의 관료가 대독한 것이죠. 그게 실제로 김정은이 쓴 것인지 알 길이 없을 뿐더러, 김정은의 음성도 북한의 공식매체에서 발간된 것도 아닌데 대체 뭘 어떻게 얼마나 믿으라는 건지. 아주 잘 인용되는 김정은의 신년사나 노동신문 지면같은 것도 이럴 경우만은 전혀 인용되지 않고, 북한에서 보내온 그 물리적인 문서, 하다못해 팩스로 전송된 사본의 모습 또한 이럴 때만은 공개되지 않아요.


둘째, 책임의 무게.

예의 통지문 전문을 보면 그게 드러나고 있어요.

[전문] 김정은 사과 "불법 침입자 규정따라 사살... 부유물만 소각", 2020년 9월 25일 한국일보 기사

첫째 쟁점인 실재성 및 공신력이 충족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있어요.

이미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명의는 어디까지나 조선노동당 통일위원회 통일전선부. 김정은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고는 있지만, 그의 이름은이 문서의 발행자로 등장하는 게 아니죠. 즉 "국무위원장 김정은" 이 "뜻 전하라고" 전언한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러니 처음부터 이미 빠질 사람은 다 빠져 있는 상태.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 정도만 있지 나머지는 해당 사건에 대한 처리와 책임은 없고 앞으로의 할 것만 추상적으로 나열되어 있다는 것. 즉 김정은이 이 사태에 대해 책임지고 하겠다는 것은 없어요. 이미 주어도 없는 마당에 술어가 의미있을 리가 없고, 죽은 사람에 대한 연민, 배상 등의 것은 전혀 없는 것. 즉 책임의 무게는 있다 하더라도 논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요. 이게 사과라고 생각된다면 그런 지능이 가치가 있을지는 상상에 맡기겠어요.


셋째, 오락가락하는 문체.

"미안한 마음을 전합니다" 라는 표현이 사과라고 하더라도 문체가 오락가락하는 이상 이것의 신뢰도는 급전직하해요.

"우리는 귀측 군부가 무슨 증거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불법 침입자 단속과 단속과정 해명에 대한 요구 없이 일방적 억측으로 만행, 응분의 대가 같은 불경스럽고 대결적 색채가 강한 어휘 골라 쓰는지 커다란 유감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라는 문장 및 "벌어진 사건에 대한 귀측의 정확한 이해를 바란다." 는, 진심으로 사과하는 게 아니고 하기는 싫고 안하면 더 불리해지니 마지못해서 꺼내는 표현. 실생활에서 이따위로 조건부 사과를 하고도 그게 받아들여지는 상황이 얼마나 있을까는 의문인데, 역시 북한이라는 마법 덕분에 그것도 이렇게 치유되는 거군요. 하긴, 치유라고 했지, 治癒라고는 말 안했어요. 치유가 "치명적 유해물" 의 약어일 수도 있는데다 확실히 한자로 쓰지도 않았으니까요.


계몽군주, 전화위복 등등의 언급에 대해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인용하겠어요.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