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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수업] 도시 이야기

Lester 2019.06.07 10:57:05

문득 생각해 보니 저는 도시에 대한 애착이 강한 편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도시에 살았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뭔가 '도시니까 모든 게 가능하다'라는 막연한 기대 같은 걸까요? 이러한 생각의 근원을 쭉 따라가보니 일단은 역시 어렸을 적 게임의 영향이 지대한 것 같습니다. 그 당시의 게임 + 도시라면 역시 그것밖에 없죠. 심시티. 가장 처음 보기만 했던 것은 양호실 컴퓨터에 깔려 있던 심시티 2000이었고, 실제로 처음 플레이해본 것은 SNES 버전 심시티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시뮬레이터는 저에게 어려운 분야라서 결국 파괴만 일삼다가 끝났지만요.


하지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역시 만화 '시티헌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성인물이라서(...) 스캔본으로 본 건 차치하고, 장르가 아닌 내용상 어반 판타지(?)를 최대한 구현한 물건이라 넋놓고 봤던 기억이 납니다. 마법이나 드래곤이 나오진 않지만 어쨌든 모험 활극이고, 스토리와 관계없이 화려한 도시의 일상이나 풍경을 감상하는 재미도 있었으니까요. 나중에 위키 등의 해외 정보통을 접하고 나서야 거품경제의 실상을 그대로 담아낸, 다른 의미로 '판타지'라는 사실을 알고 좀 충격도 먹었지만요. 그래서인지 후속작 엔젤하트는 화려함보다는 소박함이, 화끈함보다는 가족애가 두드러지는데 이 역시 도시의 또 다른 단면이기에 재밌게 읽었습니다.


(나중에 생각나서 적습니다만) 그 밖에 월리를 찾아라 시리즈처럼 도시를 배경으로 삼으면서 이것저것 재미난 요소들을 넣어둔 작품도 제 성향에 큰 영향을 줬더군요. 실제로 그것 비슷하게 연습장에 비슷한 그림들을 그렸으니까요. 그것도 언제부턴가 한계에 도전한다는 명목으로 1장에 200명, 400명, 600명 하는 식으로 숫자 늘리기에 급급했지만(...). 어쨌든 옴니버스물과 자잘한 요소를 좋아하는 성격은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GTA2를 필두로 도시를 배경으로 삼은 '범죄' 액션 게임들을 플레이하며 관련 정보들을 번역해서 그런지 도시에 대한 생각이 다른 쪽으로 구체화되고 말았습니다. (어쨌든 번역가라는 부업에 도움이 됐지만, 그건 나중에 얘기할게요) GTA를 '연구'한답시고 고전작 신작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플레이해본 기억이 납니다. GTA 시리즈 중에서도 바이스 시티(마이애미의 화려함), 트루 크라임 LA, 리걸 크라임, 크라임 파이터즈... 게임 이름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때부터 도시 그 자체보다는 범죄로 초점이 돌아가 버렸습니다.


장르적인 연구(주로 조직범죄 등의 묘사)엔 제법 도움이 되었다곤 생각하는데, 처음에 가졌던 도시에 대한 '환상'과는 거리가 멀어져버린 거죠. 그러니까, 판타지(시티헌터)와 리얼리티(GTA 시리즈)라는 대립적 요소에서 후자를 택해버렸다고 해야 하나? 지금도 남아 있는 GTA 팬카페에 쓴 팬픽들을 시간순으로 정렬해 보면, 초기에서 후기로 갈수록 작품 내 분위기와 사실적 묘사가 반비례하는 게 확연히 느껴지더군요. 초기엔 시티헌터를 그대로 베낀 듯한 GTA:Cheonju(天州, 그러니까 제가 사는 전주의 패러디입니다. 어유, 부끄러워라!) 같은 물건도 나왔는데 뒤로 갈수록 GTA 시리즈의 설정을 기반으로 치밀하게 흘러가는 대신 원작에 '물들어서' 많이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론 세상이 너무 각박해져서 도시가 오히려 무서운 곳으로 변모해버린 영향도 있겠죠. 거기에 힘입어 네오 누아르 같은 장르도 활발해졌고요. 근래 들어 제가 사이버펑크나 신스웨이브 같은 물건에 심취한 것(예전 글 참고)도 그 까닭인가 봅니다. 아마 지금 쓰고 있는 코스모폴리턴이 계속 오락가락하는 것은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머리는 계속 과거의 판타지(시티헌터)를 추구하는데, 몸과 손은 이미 물들어버린 리얼리티(GTA 시리즈)를 따라가고 있으니...




이렇게 머릿속에선 판타지냐 리얼리티냐에 대한 고민이 끝이 없고, 그러다보니 글은 안 써지고, 설정은 설정대로 양쪽 분야 모두 폭주하고 있으니... 총체적 난국입니다. 솔직히 지금 소설을 쓰는 것도 누구 재밌으라고 쓰는 건지 이제 알지도 못하겠습니다. 나름 웃음 포인트라고 넣어봤는데 반응은 시큰둥하고, 연재 텀이 길어지면서 저부터가 무슨 의도로 이 전개를 생각했는지 기억도 안 나니... 현재 연재분을 그대로 이어가야 하는지 아니면 또 리부트를 해야 하는지 굉장히 고민됩니다. 이미 에피소드 2개만에 리부트하고 연재하는 거라 가급적이면 계속 이어가고 싶지만, 그야말로 지옥길이네요.


뭐 아무튼, 너무 범죄물에만 물들어버린 장르 편향성을 최대한 중립적으로 만들기 위해 반대되는 성향의 작품들을 계속 보고 있는 편입니다. ARIA 같은 치유물, Q.E.D.같은 소프트한 추리물 등으로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브레이크와 과부하가 걸려서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요. 현재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딱 하나입니다. 꼭 범죄물이 아니라도 스토리를 써낼 수 있다는 것. 지금은 이 명제를 최대한 연구하고 관련 에피소드를 써내서 증명(?)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가서... 현재 잘 풀리지 않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도시 관련 작품을 접하면서 이것저것 끌어다 쓰는 데에 급급했습니다. GTA 팬픽들이 그랬고, 그나마 지금 쓰는 작품들은 자체 배경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구역이 도시의 어느 쪽에 있고 무엇으로 유명하다' 정도지 체계적으로 잡힌 건 아닙니다. 심시티급으로 막 산업간의 연계성 등을 따질 필요까진 없으니까요. 하지만 대략적인 지형과 그에 따른 도시의 발전 방향 정도는 연구해 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런 지형이었으니까 이 쪽엔 무슨 산업이나 건물이 많고 도로가 어떻게 되어 있다' 등이요. 이것들을 손쉽게 알아보려면 어떤 걸 참고하는 게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