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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전반의 옛 전화사기

SiteOwner 2018.09.14 19:50:42
전화사기 하면 요즘에는 정부기관, 금융회사 등을 사칭한다든지, 가족이 납치되었다는 거짓 정보로 수신자를 당황시켜 상황판단을 방해하여 돈을 보내게 만드는 보이스피싱이 연상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보이스피싱 이전에도 기상천외한 전화사기는 있었습니다. 그 중 1990년대 후반 및 2000년대 전반에 걸쳐 유행했다가 사라진 것들을 소개합니다.

이 글은 전화사기에 당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는가를 위해서 쓴 것으로, 범죄행위를 권장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이 글은 이용규칙 게시판 제19조 및 추가사항을 준수합니다.

1990년대 후반은 핸드폰 보급이 본격화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저희집은 아주 부유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고 부수입원도 있었다 보니 가용자금은 비교적 많은 편이었고, 그래서 지방의 집과의 신속한 연락을 위해 핸드폰을 일찍부터 마련해서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핸드폰 보급이 본격화되었다 하더라도 핸드폰 사용자는 그리 많지 않았고, 특히 대학생이 핸드폰을 소지, 운용하는 그 자체를 과소비로 보는 시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점을 노린 전화사기도 생겼습니다. 모 어학계열 출판사 쪽의 사람이라면서 영어학습용 월간지를 구매하라는 것인데,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앳된 목소리의 여성으로, 애교를 잔뜩 섞어가면서 정기구독을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구독권유의 말 중 아직도 생각나는 게 몇 가지 있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이었습니다.
"철없는 여동생에게 용돈 준다는 셈 치고 구독해 주세요...잉잉..."
"이거 구독해 주시면 오빠와 만나 줄께요."


여기서 잠깐 당시의 시대상 하나를 부가설명해야겠습니다.

1993년에서 1994년까지 온갖 엽기범죄를 저지르고 다녔던 지존파라는 폭력조직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부자를 증오한다면서, 범행대상을 물색하기 위해 백화점 고객명단 등을 입수하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인터넷 태동기라서 요즘보다는 정보를 구하기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작정하고 정보를 구하려면 어떻게든 구할 수도 있었고, 게다가 정보보안에 대한 의식 자체가 그렇게 철저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시대상에 미루어 볼 때, 핸드폰 사용자 리스트를 확보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으리라 보입니다. 게다가 당시 20대 대학생이 핸드폰을 갖고 있으면 부유층으로 추정가능하니 이러한 사람들을 공략해야 한다는 모종의 마케팅전략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칭 여동생 컨셉트로 어필하고, 데이트 등을 미끼로 구독을 권유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그런 게 통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제 여동생은 그렇게 전화하는 사람들처럼 징징대지도 않는데, 뭐가 아쉽다고 그런 작위적인 어필에 흔들리겠습니까. 그리고 문제의 그 어학계열 출판사 쪽에 연락해서, 그런 마케팅은 하지 마라고 직접 요구했습니다. 출판사 쪽에서는 그런 마케팅은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재미있게도 그렇게 요구하고 나니 지겹게 오던 전화가 단 한 통도 걸려오지 않았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깁니다.


세기가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군복무를 마치고 휴학 중의 직업활동, 복학, 취업 등을 겪은 2000년대 전반에 또다른 유형의 전화사기를 만났습니다.

이번에는 1990년대의 자칭 여동생 컨셉트는 없지만, 사람의 심리적 약점을 이용한 보다 고도화된 것이 나타났습니다. 전화를 건 쪽은 일부러 틀린 정보를 말하고, 받은 쪽이 화내면서 반응하다가 실제의 정보를 말하게 하는 방식.


대략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거는 쪽..."여보세요, 홍길동씨 맞으신가요?"

받는 쪽..."아닌데요,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거는 쪽..."홍길동씨 맞으시잖아요?"

받는 쪽..."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다가 받는 쪽이 이렇게 반응하면 목적달성.

받는 쪽..."아 나 홍길동 아니라고!! 나 이몽룡인데 뭔 소리야!!"


이렇게 해서 핸드폰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특정해서, 물품주문 장난 등을 친다든지 하는 명의도용도 꽤 일어났습니다.

저 또한 그러한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고, 몇번은 말려들 뻔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일부러 틀린 정보를 제시하는 식으로 도발을 지속하면, 듣는 사람은 은연중에 그 틀린 정보를 교정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고, 그 틀린 정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진짜 정보, 즉 자신의 개인정보 같은 것을 무방비로 내보이게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저는 그런 전화에 대해서는 일부러 방치해 두었습니다.

즉 누구 맞냐고 계속 물어보다가 거는 쪽에서 지쳐서 알아서 끊어 버리게 만드는. 어차피 전화비는 거는 쪽이 내야 하는 것이고, 저는 답답한 게 전혀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런 유형의 전화는 더 이상 오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의 변종으로서 이런 것도 있습니다.

모 항공사의 무료항공권에 당첨되었다면서, 개인정보를 알려주면 우편으로 보내 주겠다는 유형의 것이 그것입니다. 무작정 전화해서 누구냐고 묻는 방법이 통하지 않게 되면서 예의 방법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만,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들에게 우편주소까지 알려줘야 할만큼 항공권에 목숨을 걸 이유도 없었는데다 그들이 진짜 보내준다는 보장도 없어서 그런 전화는 바로 끊었습니다. 처음에는 끈질기게 다시 전화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좀 있었는데, 계속 끊으니까 포기하더군요. 한번은 새벽 4시 언저리에 전화가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모종의 살의마저 느껴졌습니다.



제반여건이 좋을 때는 물론이지만, 좋지 않을 때에도 어떻게든지 나쁜 쪽으로 머리를 써서 목적달성을 하려는 인간은 존재하고, 이미 정보화사회의 태동기에도 그런 사람과 수법은 존재했습니다. 그걸 떠올려 보니, 기술이 사람을 나쁘게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기술을 나쁘게 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