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용어 중에, 각하(却下)와 기각(棄却)이 있어요.
이 두 개념은 둘 다 제기된 사항을 거부한다는 의미이지만, 완벽히 같지는 않아서 서로 바꿔 쓸 수는 없어요.
일단 각하부터 살펴볼께요.
이건 간단히 말해서, 판단할 가치도 없으니 그냥 거부한다는 의미.
육하원칙으로 정리해 볼께요.
- Who - 당사자적격
- 소송제기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 소송을 걸어봤자 처음부터 거부당하게 되어요. 서울에 사는 한국인 갑과 부산에 사는 한국인 을이 대전에서 만났는데 서로 치고박고 싸우는데, 현장에 없었고 갑, 을 누구와도 생면부지인 뉴욕에 사는 미국인 병이나 파리에 사는 프랑스인 정이 그 폭력사건으로 소송을 건다든지 하는 경우.
- What - 대상적격
- 재판에서 다루어야 할 사항이 아닌 것을 재판에서 다루어야 할 이유가 없어요. 자연과학의 연구결과의 진실성 같은 것은 학계가 검증해야지, 재판이 판단할 사항은 아니니까요.
- Where - 재판관할
- 상당히 복잡한 문제이긴 한데, 크게 속인주의, 속지주의, 수동적 속인주의, 보편주의 같은 것들이 있어요. 속인주의는 사건의 당사자를 기준으로 하는 것, 속지주의는 사건이 발생한 장소를 기준으로 하는 것, 수동적 속인주의는 피해자의 국적국을 기준으로 하는 것, 보편주의는 해적, 테러리즘 등 어느 나라든지 재판관할권을 행사가능한 것을 말해요. 위 당사자적격 관련 사례를 봤을 때 미국인 병, 프랑스인 정의 국적국은 재판관할권 자체가 아예 없어요.
- When - 제소기간
- 법에 규정되어 있는 기간을 넘기면 이것 또한 성립할 수 없어요. 물론,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불가능하고, 타임머신 같은 게 있어서 특정사건을 예지했다 하더라도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아요.
- Why - 소의 이익
- 원고가 재판을 진행해서 실질적인 이익을 얻을 수 없는 경우에는 해봤자 의미없는 재판이니까 처음부터 시작할 필요성 자체가 없어요. 물론, 이익이 있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것을 주장해봤자 들어줄 사람도 없어요. 처음의 당사자적격 사례에서, 갑이 을을 살해할 권한을 요구한다든지 을이 갑의 자녀를 노예시장에 처분할 것을 요구한다든지 하는 것을 누가 수용할까요?
- How - 절차상 하자
- 잘못된 방법은 무조건 거부당해요. 이를테면 서류를 직접 작성해서 창구에 제출해야 하는데 우편으로 보낸다든지, 텍스트를 검은색 필기구로 작성해야 하는데 녹색 형광펜으로 작성한다든지, 필요한 서류가 빠졌다든지 하면 처음부터 폐기대상.
반면에, 기각이라는 말은 위의 것들을 다 만족하는데 내용을 보니까 적합하지 않아서 버리는 것을 말해요. 그러니 기각은 최소한 형식은 갖췄지만 내용에서 탈락, 각하는 형식조차 안되어서 내용을 볼 가치도 없는 것.
각하의 일본어 발음은 캭카(きゃっか).
그래서, 마치 고양이가 기분나쁘거나 싫은 상황을 접할 때 캬악하는 것 같이 들리기도 해요. 특히, 역시 내 청춘 러브코미디는 잘못되어 있다 애니에서 유키노시타 유키노가 이 단어를 말할 때 더욱 그렇게 들려요. 성우가 독기어린 매도 연기로 유명한 하야미 사오리인데다가 캐릭터의 성격도 고양이를 좋아하다 보니.
그런데, 간혹 어떤 곳에서는 각하와 기각을 혼동해서 쓰는 경우가 보이네요. 그런 건 사양하고 싶은데...혼동이 줄어들면 좋겠네요.
고양이의 언어로 다시 요약해 볼께요.
보자마자 캬악!! 하면 각하, 먹어보고 퉷!! 하면 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