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병원에 갔다오고 나서 일찍 돌아와 있습니다.
특별히 어디서 아파서가 아니라 예정된 정기검진 일정이니 걱정하시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병원에서 문득 1988년 6월과 9월의 어느 날이 생각났습니다.
날짜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최소한 무슨 일이 있었고 누가 관여되었는지만큼은 확실히 기억나는군요.
당시 국민학교 5학년이었던 저는 학생회 차원에서 같은 반 학생의 병문안을 가야 했었습니다.
저의 직책은 서기였고, 이전의 글인
단신의 두 남학생에 등장하는 K군이 반장, L양이 부반장, S양이 총무였습니다. 그렇게 저를 포함한 네 학생은 선생님의 승용차를 타고, 그 학생의 입원장소인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통칭 동산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대구경북 이외의 지역에 거주중이신 분들을 위해 조금 부연하자면, 동산병원은 대구시내의 유명 대형병원으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입원한 학생은 교통사고를 당해 골절상을 입은 N양.
그 N양과 저는 접점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4학년 1학기 때에 다른 지역에서 전학온 아이였고, 4학년 때에는 N양과 같은 반도 아니다가 5학년에 들어서야 겨우 같은 반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친분도 없었습니다. 그 N양은 위에서 말한 총무 S양과 특별히 친해서 거의 그림자같이 따라다니고 타인과는 조금도 접점을 두지 않았기에 친분조차 생길 리가 만무했지요. 딱 하나 그 N양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은, 4학년 때 교실에서 똥을 쌌다는 해프닝 하나였습니다.
그렇게 동산병원에 도착했고, 선생님의 인솔하에 문병을 가게 되었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간호사가 저와 K군은 들어가지 말라고 막았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어린애가 출입하면 안된다나요. 둘 다 키가 꽤 작은 편이었다 보니 그냥 어린애로 봤는가 봅니다. 그리고 선생님과 중학생 누나들만 들어갈 수 있다고도 하네요.
"같은 국민학교 5학년생인데요?" 라고 항변해도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하긴 L양과 S양은 키가 꽤 큰 편이어서 160cm를 좀 넘겼고, 저는 당시 145cm도 안되었으니까 그렇게 보이더라도 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는 중학생과 고등학생에 교복착용이 의무화된 것도 아니라서, 여자아이가 키가 좀 크고 가슴이 좀 나왔고 옷을 좀 어른스럽게 입으면 국민학생도 중학생으로 보이고 그랬습니다.
저와 K군만 들어가지 못한 문병이 끝나고,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그날 일정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해 9월.
N양이 다시 학교에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뜸 저를 보고 화를 내네요. 어떻게 학생회 사람이라면서 다쳤는데 문병도 안왔느냐고 다짜고짜로 화를 내고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퍼붓고 그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병실에 안 가고 싶어서 안 간 것도 아니고, 병원측에서 막는데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걸 이야기하니까 한다는 말이 남자답지 못하네, 그러면 억지로라도 들어가서 와야 하는 거 아니냐, 그렇게 남자답지 못하면 그걸 떼내버리라니 키도 작은 게 어쩌고 하는 온갖 인신공격을 늘어놓다가 혼자 주저앉고 울어버리기까지 합니다.
한동안 멍하게 있다가, 이전에 들었던 소문이 생각나길래 한마디 해줬습니다.
"왜, 똥 한번 더 싸려고?"
그렇게 저를 욕하다가 도리어 1년 전의 사건이 들춰져서 공개망신당한 N양은 그 뒤로는 저에 대해서만큼은 아무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중학교에 진학하기도 했지만, 중학교 2학년 즈음부터 키가 갑자기 크기 시작한 저와 마주치면 무서워하면서 피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게다가 각자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한 후에는 두 번 다시 마주칠 일도 생기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의 그 일은 씁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N양이 꼭 저에게 그렇게 그런 몹쓸 소리를 했어야 했는지, 그리고 당시 동산병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선생님과 L양과 S양 중 누구도 정황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았거나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은 것인지, 그리고 그 K군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고 저에게만 온갖 패악질을 부렸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나쁘게 이야기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도 필요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성악설을 지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