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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송년인사와 2024년 새해인사

Lester 2023.12.31 15:04:11

작년(2022년)도 적지 않게 혼란스러웠는데 체감상 그런 것인지 정말로 그런 것인지, 올해(2023년)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진 것 같습니다. 작년에 이태원 사고로 경각심이 들어서인지 안전사고는 줄었습니다만, 대신에 개개인의 산발적인 문제 행동이 여기저기서, 그것도 사전 전조 없이 터져나와서 그렇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네, 하인리히의 법칙을 얘기하는 게 맞습니다. 일명 1:29:300의 법칙, 즉 대형 사고가 벌어지기 전에는 그와 비슷한 경미한 사고가 수십 차례, 징후가 수백 차례 나타난다는 이론이죠. 그리고 저는 이 '안전불감증'을 사회의 전반적인 측면에 적용해서 얘기하는 것이라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나라 망해버려' 하는 개개인의 의견은 이미 작년에도 인터넷에 많았지만, 그것이 본격적으로 현실화된 것이 올해부터라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죠.


다만 저는 이것이 오로지 제 기우에 그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애국심이니 비국민이니 하는 맹목적인 속단이 아니라, 자기가 발을 디고 살아가는 나라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정말로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터넷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자기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며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고, 심하면 '이민 가면 그만이다'라며 비웃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그것이 정말로 가능했다면 진작에 이민을 갔을 것이며, 이 땅에 남은 이상 영향은 고스란히 받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라 망해라' 하는 의견들도 곱씹어 보면 무턱대고 비난을 일삼는 게 아니라 (근거가 부족하거나 제시하지 못할지언정) 최소한 무엇이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심 '나라 망하지 마라' 하는 심리가 엿보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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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돌아가는 걸 파악하는 눈은 없으니 개인적인 얘기로 옮겨가자면, 저는 진심으로 올해가 가장 바쁘고 힘들었습니다. 대규모 프로젝트 두 개를 동시에 진행하느라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말이 아니었고, 막상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에 대한 위안을 받지 못해서 더욱 피곤하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그 사건은 경황이 없던 저를 일격에 보내버렸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작업이 끝난 이후에도 게임번역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관두지 않고 평생 하고 싶은 일인데, 왜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아진 것인가 하고 말이죠.


다행히 정신과를 다녀오고 나서 약간의 깨달음과 위안을 얻었습니다. '일의 목적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저는 게임번역을 시작했을 때 그저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나 정보를 전달하고 싶다'는 개인적인 취향이나 사명감이 우선했고 그 다음이 돈이었지, '명예를 얻어서 유명해진다'는 생각은 딱히 없었습니다. 유명해지고 싶었다면 진작에 얼굴도 인터넷에 공개하고 인터뷰 같은 걸 찾아보고 다녔을 테니까요. 물론 솔직히 사람인지라 유명해지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이 유명해지려면 그만한 근거, 그러니까 성과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 큰 일을 해내면 영광은 거기에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라는 말이죠. (물론 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게임번역으로 살짝 부족하게 밥벌이밖에 못하는 제가 곧장 유명해져서 방송을 탈 수나 있을까요? 유명해지고 싶다는 마음에 본업을 가볍게 여기는 건 아닐까요? 실제로 지금 맡아놓은 작업은 다행히 마감이 정해지지 않은데다 연말이라서 느긋하게 하고 있습니다만, 평상시였다면 다소 고생해서 끝내놓고 다음 작업을 기다리며 뒹굴거렸을 것입니다.


그래도 문단 처음에 썼던 것처럼 올해는 정말 고생 많이 했다고 생각하기에 아직은 더 쉬고 싶습니다. 마감이 정해지지 않았고 그 쪽에서 따로 재촉한 것도 아닌데 굳이 저 자신을 채찍질하며 서두를 필요는 없는 거죠. 체력과 감이 좋을 때(소위 'Feel 받았을 때') 순식간에 끝내는 게 제 스타일이기도 했고. 그래서 설날 전까지는 다소 뻔뻔하게나마 더 휴식을 취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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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2024년)는 용의 해입니다. 용이란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강의 생물이자 다스리기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국내는 물론 세계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것도 이 세상이 용의 등에 올라타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궁금해서 용에 대한 속담이나 격언을 찾아봤더니 역시 이런 것들이 있더군요.


 * 용 될 고기는 모이 철부터 안다 :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의 용 버전입니다.

 *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 의리도 인정도 없이 심술만 있어서 남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 자가사리 용을 건드린다 : 약한 것이 자기 힘으로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것을 건드린다는 뜻입니다.

 * 비 맞은 용대기 같다 : 크고 화려한 용이 그려진 깃발이 비에 젖어 축 늘어진 모양대로, 무엇이 추하게 늘어진 모양을 의미합니다. 위 속담의 정반대라 할 수 있겠습니다.

 * Tickle the Dragon's Tail : 직역하면 '용의 꼬리를 간질이다'는 말로, 속뜻은 위험한 행동을 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우리 속담 중에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격이다'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 Sow Dragon's Teeth : 직역하면 '용의 이빨을 심다'는 말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카드모스 이야기에 빗대 문제가 터질 일을 저도 모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카드모스는 용의 이빨을 심어서 나온 용아병들과 함께 테베를 건국했지만 그 후손들은 모두 안 좋은 운명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오이디푸스가 있다네요.

 * Here be Dragons : 라틴어 hic sunt dracones의 영어 표현으로, 직역으로는 "여기 용들이 있다"는 말이나 속뜻은 "탐험하지 않은 위험한 영역"을 의미합니다. 즉 으레 판타지에서 묘사하는 용이 살고 있어서 범접할 수 없는 지역 말이죠.


이 중에 Here be Dragons는 개인적으로 2024년의 표어로 삼고 싶기도 합니다. 가령 ChatGPT 같은 경우엔 작년 말(2022년 10월)에 공개되어 2023년 내내 큰 화두로서 인류의 노동(혹은 게으름)을 해소할 것이라는 찬론과 생계를 위협할 것이라는 반론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싸움터가 됐으니까요. 뉴스에서 지나가듯이 듣기로는 중국 경제는 서서히 불안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우리나라 역시 저출산 때문에 미래가 암울합니다.


본문 처음에 언급한 하인리히의 법칙처럼 이것들이 무언가의 전조라면, 불안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인류는 불확실한 미래를 극복하기 위해 최대한 예지하고 대책을 세워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미래가 정확히 어떻게 흘러갈지 아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이렇게 위험을 용에 빗댄 관용어구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2024년이 용일지 이무기일지는 2025년이 되어봐야 알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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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늘 그렇듯이 새해는 부디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앞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계속 했지만, 어차피 저처럼 미약한 개인이 세상에 큰 영향력을 끼치기는 애초에(혹은 아직) 무리이니 괜한 고민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한 사람의 게임번역가로서 변변찮은 삶을 일단 계속 이어가는 것이 급선무가 아닌가 싶습니다. 혹시 모르죠. 그러다 용의 꼬리라도 될지 모르니까요.


이 글을 쓰는 기점(오후 3시 2분)으로 9시간 뒤면 2023년이 끝납니다.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치는 걸 관람하거나 새해 해돋이를 보러 갈 형편이 되지도 않고, 수고롭기만 할 테니 조용하게 혼자 맥주캔으로 축배를 들까 합니다.


포럼 여러분들께서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