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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언어가 주체적이라는 환상을 깨준 이야기

SiteOwner 2022.11.09 20:04:42
여전히 사회 곳곳에 반공적인 분위기가 많았던 1990년대에도 이상하게 북한의 언어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북한의 언어가 주체적이라는 믿음이 팽배해 있었다 보니 그러했습니다. 특히 당대에 유행했던 언어순화에 영어나 일본어에서 유래한 어휘를 몰아내자는 담론이 아주 지배적이었다 보니 영어나 일본어 유래의 외래어를 쓰지 않는 북한의 언어생활에 배울 것이 있다 운운하는 발언은 이상할 정도로 큰 호응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 환상을 대학생 때의 수업중 토론으로 박살내 버린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 시점에서 저는 독일어, 일본어 및 러시아어를 조금씩 구사할 수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조사를 마쳐둔 게 있었습니다. 여러 학생들이 북한이 고유어를 잘 살려쓰고 영어는 아예 안 쓰는데다 역시 친일파를 숙청한 정통성 있는 정권답게 일본어도 배제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저의 발표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럼, 주머니종, 바레에, 고뿌, 벤또, 전색은 뭔지 아시는지요?"
아무도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리고 해설을 하나하나 해 주었습니다. 모두가 북한에서 쓰는 어휘이고, 차례대로 무선호출기(삐삐), 발레, 컵, 도시락, 뒷조사의 의미인데다 어원이 일본어의 포케베루(ポケベル), 바레에(バレエ), 콥뿌(コッブ), 벤토(弁当), 센사쿠(詮索)라고. 특히 주머니종은 일본어 조어의 포켓+벨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다 바레에, 곱뿌 및 벤또는 일본어 발음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고 전색은 센사쿠의 한자표기를 한국어로 읽은 것에 불과하다고.
누가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북한에서는 벤또라는 말은 없고 도시락에 대응되는 북한의 어휘는 곽밥이라고.
그래서 저도 받아쳤습니다. 당시는 여만철씨 일가의 탈북에서 몇년 안 지난 시점인데다 당시 기자회견 당시 그의 딸 여금주씨가 "벤또" 라는 말을 썼던 기사를 준비해 두었다 보니 즉좌에서 반박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반박한 사람은 한 마디도 못 하고 수업 끝까지 침묵을 지켰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더 나서서, 북한이 그렇게 좋아하는 공화국도 일본에서 만들어진 조어라는 점을 거론했습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강변했습니다. 최소한 북한은 영어같은 서양언어에서 어휘를 빌려오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일부러 도발하듯이 비웃으면서 대꾸했습니다. "서양 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수용해 오면서 어휘는 잘도 빼놓고 오겠군요." 라고.
건방지다고, 왜 비웃느냐고, 당신이 북한에 가보기라도 했냐고 야유가 쏟아졌지만 그런 것은 싹 무시하고 자료를 제시했습니다. 삐오네르, 꼴바사, 뜨락또르, 모또찌끌, 버미돌, 사바까 등에 대해서. 
삐오네르(Пионер)는 개척자의 영단어인 파이오니어(Pioneer)과 같은 기원의 단어로 소년단을 지칭하는 어휘.
뜨락또르(Трактор)는 트랙터의 영단어인 트랙터(Tractor)와 같은 기원의 단어로 사실상 키릴알파벳으로 옮긴 것에 불과한 말.
꼴바사(Колбаса)는 소세지의 러시아어 어휘. 정확한 발음은 "깔바사" 에 가깝습니다.
모또찌끌(Мотоцикл)은 모터사이클의 러시아어 어휘. 이것도 뜨락또르처럼 알파벳만 키릴알파벳으로 옮긴 수준입니다.
버미돌(Помидор)은 토마토의 러시아어 어휘로 발음은 "뽀미도르" 입니다. 함경도 사투리에도 수용된 단어입니다.
사바까(Собака)는 개의 러시아어로 북한 정권 초기의 박씨 성을 가진 4명의 통칭인 "사박가(四朴家)" 에 대한 멸칭으로 쓰인 어휘입니다.

이런 것들을 열거하면서 이래도 서양언어에서 어휘를 빌려온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면 말해 보라고 좌중을 보고 일갈하니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북한의 언어와 문화를 다루던 그 수업에서 북한의 언어생활이 주체적이라고 주장했던 학생들은 학기가 끝날 때까지 저에게 어떠한 반론도 못한 채 그대로 기말시험을 맞이했고, 그들과의 인연은 그 강좌를 끝으로 끊어졌습니다.